몸젠의 로마사 5 - 혁명 : 농지개혁부터 드루수스의 개혁 시도까지 몸젠의 로마사 5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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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와 희랍, 아시아이 국가들은 공식적인 독립과 사실적인 종속의 중간이라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들은 로마가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쉬리아 등과 벌인 전쟁과 전후 처리 과정에서 로마 패권의 영역 안으로 귀속되었다. 독립국가라면 그래야만 할 때 전쟁의 수고를 부담할 것이고 독립 유지의 이런 대가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다. 또 독립을 잃은 국가라면 상실의 보상으로 적어도 주변국들로부터의 안전을 보호국에게 보장받을 수 있다. 하지만 로마의 피호국가들은 독립도 안전 보장도 얻지 못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8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1817~1903)의 <몸젠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5>에서 우리는 제국(帝國)의 길로 가는 로마를 확인할 수 있다. 카르타고 전쟁에서 멸망의 위기를 겨우 넘겼던 이들은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일까.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등 한때 번영했던 도시와 국가들은 모두 잿더미로 만들면서, 지중해연안을 로마의 세력권으로 만드는 것에 성공한 로마시대가 새롭게 열린다.


 원로원은 사령관에게 카르타고 도시와 도시 외곽의 마갈리아를 철저히 파괴할 것과, 마지막까지 카르타고에 협력한 모든 지역도 남김없이 파괴할 것을 명했다. 또한 카르타고 땅을 갈아엎을 것을 명했다. 이는 이후로 법적 형태의 도시가 존립할 여지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는바, 카르타고 땅을 영원히 황무지로 만들어 주거와 경작이 일체 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원로원의 명령은 그대로 시행되었다. 17일 동안 카르타고는 불탔고 폐허를 남겼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55


 희랍의 첫째가는 무역도시인 번영의 코린토스를 아무 동기 없이 파괴한 것은 로마 연보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원로원의 확고한 명령에 따라 코린토스 시민들은 구금되었고 목숨은 부지했지만 노예로 팔려갔다. 도시 성벽과 성채는 파괴되었다. 장기간 도시에 주둔할 의사가 없었을 때 불가피한 일이지만, 도시는 초토화되었고, 황폐한 폐허 위에 모든 재건 행위를 일체 금지하는 일반적 저주가 내려졌다. 도시의 일부는 시퀴온이 코린토스를 대신하여 이스트미아 축제의 비용을 떠맡는다는 조건으로 시퀴온의 영토가 되었고, 도시의 대부분은 로마 공동체의 소유로 선포되었다. 이리하여 한때 수많은 도시국가들로 가득했던 희랍 땅의 마지막 남은 소중한 보물, '희랍의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74


 로마에게 패권을 안겨준 카르타고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이었지만, 두 전쟁의 성격은 달랐다.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지중해 전역이 전장이었던 카르타고 전쟁과는 달리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그리스와 아시아 일대에서 벌어진 마케도니아 전쟁을 거치면서 로마군은 빠르게 명성을 잃으며 심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원인은 상층부인 원로원의 폐쇄성과 하층부 자영농의 몰락에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체제 개혁의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주장되었다.


 실현 가능한 유일한 방안은 이들 피호 국가들을 로마의 속주로 변신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실현 가능성을 더욱 높이는 방안은, 로마의 속주 정책을 크게 나누어 속주 총독은 오로지 군사 영역을 관장하고 주요 행정과 재판은 속주 공동체에 맡기거나 맡겨야 한다고 천명함으로서 과거 정치적 독립을 누리던 것들 가운데 계속해저 존립하는 것은 공동체 자유의 형식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누구도 이런 행정 개혁의 필연성을 모를 수 없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31


 만약 통치를 현안의 처리를 넘어서는 무엇이라고 한다면, 이 시대의 로마에 통치는 전무했다. 통치집단의 유일한 주요 이념은 오로지 그들 특권의 유지, 가능하다면 확대에 있었다. 국가는 최고 관직에 최선의 올바른 인물을 천거할 권리를 가지지 못했지만, 통치집단의 구성원 모두는 최고 국가관직의 출마 권리를 태생적으로 가졌다. 이 권리가 내부자들의 부당한 경쟁이나 국외자들의 합류로 결코 위축되지 않아야 했기에, 이들 당파는 집정관의 재선을 제한하거나 '신인'의 배제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롤 삼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04


 이러한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들이 유명한 그라쿠스(Gracchus) 형제들이다. 귀족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위해 호민관에 재직하며 개혁을 주도하다가 몰락한 애석한 인물들.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지만, 몸젠은 이들에 대해 다소 냉혹한 평가를 내린다.


 토지 자본가들은 계속해서 자유민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를 고용했는데, 후자는 전자와 달리 군복무를 하지 않기 때무니었다. 그리하여 자유민 무산계급은 노예와 비슷한 수준의 가난으로 내몰렸다. 자본가들은 계속해서 품삯에도 못 미칠 정도로 저렴한 시킬리아 노예 곡물을 들여와 수도 로마의 시장에서 이탈리아 자유민 곡물을 밀어냈고,  결국 이탈리아 자유민 곡물은 이탈리아반도 전체에서 가격 하락을 겪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21


 몸젠은 그라쿠스의 개혁을 '토지 개혁이라는 이슈를 통한 대중의 지지로 호민관 지위를 활용한 독재정'의 시도로 바라본다. 농지개혁법 시행을 위해 호민관 재선을 추진하다가 죽음을 당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BCE 163 ~ 132)와 형이 추진한 정책과 식민도시 건설을 통해 현 위기를 타파하고자 했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 Gaius Sempronius Gracchus, BCE 154 ~ 121) 모두 폐쇄적 엘리트 통치를 대신한 새로운 체제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지만, 그들의 개혁을 자신들의 야망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점에서 몸젠의 평가는 신선하면서도 다소 박하게 느껴진다.


 그락쿠스 혁명의 본질적 오류는 한 가지, 다시 말해 당시 민회의 성격을 지나치게 빈번히 간과했다는 점이다. 지난날의 로마는 함께 모여서 함께 토론할 수 있던 도시국가 공동체였지만, 현재의 로마는 그 구성원을 하나의 민회에 모으고 그 민회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할 경우 통탄스럽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결과에 도달하게 될 거대 국가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41


 민회라는 녹슨 장치를 선거와 입법에 활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충분히 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군중, 그러니까 민회, 사실적으로 대중 집회가 정부를 공격하도록 허용되고 이런 공격의 방어장치를 원로원은 빼앗겼을 때, 이런 소위 시민체가 자신을 위해 모든 부속물을 포함한 농지를 국고에서 빼내 처결하게 되었을 때, 무산자들에 대한 관계와 영향력을 얻은 어떤 자가 골목길을 몇 시간 지배하게 허락되어, 그의 계획에 주권적 인민의 의지라는 법적 직인을 찍을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인민자유의 시작이 아니라 종말이었는 바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에 이르렀다. 때문에 앞선 시대에 카토와 그의 동지들은 이런 문제를 결코 민회에 회부하지 않았고 오로지 원로원에서만 다루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43


 가이우스 그락쿠스는, 과거와 현재의 많은 선량한 사람이 믿었던 것과 달리 로마 공화정을 새로운 민중적 토대 위에 재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로마 공화정을 철폐하고, 지속적인 재선의 종신 관직으로, 형식적 주권체인 민회들을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관직으로, 그러니까 무제한적 권한의 종신 호민관직으로 공화정 대신 독재정을 이룩하고자 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73


 이러한 위기 속에서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왕 유구르타(Jugurtha, BCE 160 ~ 104) 전쟁은 공화정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해 로마 원로원에 의한 통치가 결코 철인(哲人)통치가 아닌 수많은 로비의 결과물임이 드러나면서 공화정에 대한 회의가 커지고, 병농일치(兵農一致) 체제가 무너지면서 전문 전투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개혁을 통한 과저 체제에 대한 연착륙이 불가능해진 이후 등장한 두 인물, 마리우스(Gaius Marius, BCE 157 ~ 86)와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BCE 138 ~ 78)은 다음 시대를 이끌게 된다.


 아프리카 피호국의 순치보다 중요한 것은 유구르타 전쟁의, 혹은 유구르타 반란의 정치적 결과들이다. 물론 흔히 너무 크게 부각되곤 한다. 무엇보다 정부의 모든 약점이 적나라하게 세상에 드러났다. 이제 공공연해졌고 소위 최종 판결된 바, 로마의 모든 통치귀족들에게 평화조약은 물론 거부권, 주둔 요새, 병사들의 목숨까지, 모든 것이 매매 가능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37


 일시적인 위기 동안 유일하게 등장한 새로운 요소가 있다. 그것은 군사적 능력자들과 군사적 권력이 정치혁명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마리우스의 등장이 직접적으로 과두정을 몰아내고 독재정을 세우려는 시도의 계기가 되었는지, 혹은 여러 유사한 사례들처럼 그저 권력의 특권을 향한 개별적 공격이었으며 이렇다 할 결과 없이 지나가버린 사건이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째 독재정의 씨앗이 싹을 틔울 때, 그 독재정의 수장은 가이우스 그락쿠스처럼 정치가가 아니라 군인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39


 공화정 국제는 무엇보다 시민이 병사요, 병사가 시민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것이 군사제도의 혁명과 함께 사라졌고, 이제 병사 신분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새로운 군사훈련 교본이 직업적 검투사 교본에서 빌려온 군사훈련과 함께 도입되었다. 전쟁 복무가 점차 전쟁 직업으로 바뀌었다.(p297)... 만약 좀 더 중요한 문제에서 군대와 사령관의 이해관계가 반(反)국헌적 욕망에서 서로 일치할 경우, 어떤 법률이 전장의 소음 때문에 들리지 않는 일이 또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상비군이 생겨났고, 병사 신분이, 경호부대가 만들어졌다. 사회제도에서처럼 이제 군사제도에서도 미래의 독재정을 위한 기둥들이 이미 세워졌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98


 개인적으로 <몸젠의 로마사 5>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라쿠스 형제 개혁에 대한 몸젠의 평가다. 실패한 개혁가로서 후대에 여러 면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이들이지만, 몸젠은 그들을 '포퓰리스트(Populist)'로 규정한다. 물론 그들의 개혁 조치가 후대의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BCE 100 ~ 44)에 의해 상당부분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만약 그들의 개혁조치가 성공을 거두었다면 로마의 제정이 더 일찍 시작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수긍한다. 그렇지만, 역사에서 패자로 남겨진 그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냉혹한 것은 아닐까. 못다 이룬 첫사랑이 생각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에 남는 것처럼,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을 좌절시킨 정치경험 안에서 그라쿠스와 같은 이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은 허용되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피호 국가들은 우선 모든 국가와 전쟁을 할 능력이 안 되는 국가는 누구와도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피호 국가의 소유관계와 권력관계가 사실상 로마의 보장으로 존립하기 때문에 모든 갈등에 있어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웃 국가들과 호의적으로 해결하거나 아니면 로마에 판결을 요청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 P29

국가를 이탈리아반도에 국한하며 이탈리아 밖은 다만 피호 관계를 통해 지배한다는 카토 시대의 원칙이 지켜질 수 없음을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은 정확하게 이해했고, 또 이들은 이런 피호 관계가 아니라, 독립 공동체를 보장하면서도 로마 직접 통치의 관철이 필연적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신 질서를 확고하게, 신속하게 , 일관되게 도입하지 않았다. - P98

칸나이 패자와 자마 승자의 아들과 손자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 원로원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다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확고한 부와 물려받은 정치적 지위를 가진 소수의 폐쇄적 가문들이 정부를 이끄는 곳에서, 이들은 위기의 시대에는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끈질긴 일관성과 영웅적 희생정신을 발휘했고, 평화의 시기에는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이고 느슨하게 국가를 운영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세습과 동료제에 있었다 - P103

이제까지는 국가를 구성하던 두 권력, 통치하고 조정하는 권력인 정부와 입법 권력인 민회가 법정을 나누어 지배했다면, 이제부터는 물질적 이해관계의 굳건한 토대 위에 단단히 결합된 특권계급을 형성한 자본귀족이 재판하고 조정하는 권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통치하는 귀족계급과 거의 동등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 P169

로마의 군사제도를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수정하는 일을 마리우스는 5년 동안 내리 집정관직을 맡은 동안 - 그가 임명 조건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였던 무제한적 최고 명령권을 쥐고 있을 때에 - 착수하여 완성했는데, 이는 민중당파의 장군이 가진 비(非)국헌적 최고 명령권이 남긴 깊은 상흔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았다. - P276

민중당파의 개혁가들을 쓸어버렸던 똑같은 폭력적인 처참한 최후가 이제 귀족계급의 그락쿠스에게도 찾아왔다. 여기에 깊고 슬픈 교훈이 놓였다. 귀족계급의 저항이든 유약함이든, 개혁의 시도가 같은 계급에서 시작되었는데도 개혁은 실패했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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