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독일의 공업 발전은 주로 1850년대 이후 루르 지방 발전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1855년 무렵 루르 지방과 슐레지엔에 코크스 고로가 존재했다. 목탄 고로가 코크스 고로보다 많긴 했지만 코크스 고로에서 독일 선철의 50퍼센트가 생산되었다.

독일에서 강철 생산이 급속히 증가했다. 1865년 50만 톤 이하이던 연간 강철 생산량이 1913년에 5,000만 톤으로 증가했다. 1870~1913년에 독일의 강철 생산은 연평균 6퍼센트 이상 비율로 증가했고 1880년 이후 더욱 급속해졌으며, 1900년대에 영국의 강철 생산을 앞질러 1914년경에 영국의 2배, 프랑스의 3배 이상에 달했다.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 사이에 협조 체제가 강화되었다. 독일은 이러한 신산업 주도국이자 중심지였다. 이미 1870년대 초에 주식회사 자본금이 4년 만에 2배로 성장했다. 구산업(방직업)이 독일에서는 부차적이었다. 석탄, 제철, 철강이 독일 공업의 성장 동력 역할을 하면서 1890~1913년 사이에 철과 강철 생산량이 3~4배 성장했다.

근대적 화학공업이야말로 독일이 가장 성공한 분야다. 1870년대에 독일은 세계 화학제품 시장의 절반을 차지했다. 1차 대전 이전 약 25년간 독일 화학공업은 연평균 6.2퍼센트씩 성장했고 생산량은 10배 증가했다.

20세기 초의 독일 은행 제도는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었다. 제국이 통일된 후, 프로이센 국립은행이 모태가 되어 라이히스방크가 만들어졌다(1876년). 라이히스방크는 은행의 재원과 권한을 대폭 확대하여 은행권 발행을 거의 독점했다. 또한 통화 금융을 감독하면서 신용은행이 어려울 때 지원하기도 하고 독일의 금융 구조를 총괄하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했다.

독일의 기업은 급속한 수직적 결합의 전략을 채택했다. 예컨대 철공업에서 독자적인 석탄, 금속광산, 코크스 공장, 송풍로, 주물 및 압연공장, 기계공장 등을 확보했다. 독일의 공업은 총생산량에서만이 아니라 개별 생산 단위 면에서도 규모가 컸다. 20세기 초에 각 기업의 평균 생산량은 영국의 2배에 달했다. 기업 대형화와 업종 다변화로 기업 경영이 복잡해지자 경영 업무가 전문화, 조직화될 필요가 생겼다. 또한 독일은 영국과 달리 산업교육에 충실하여 과학, 경영 기술이 발달했고, 기업에 필요한 전문 기술과 경영 인력 공급도 잘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중간 경영조직을 착실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내셔널리즘이야말로 1848년 독일 중산층을 움직이는 가장 결정적 사안이었다. 독일인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은 독일 통일에서 제외한다는 원칙이 이때 세워졌다. 즉 대독일주의Grossdeutschtum(다민족 나라인 오스트리아 중심의 독일 통일 추구)가 아닌 소독일주의Kleindeutschtum(프로이센 중심의 통일 추구)가 채택되었다. 이로써 새 통일 헌법에서 오스트리아,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은 제외되었다.

비스마르크는 기존의 보수층이 자유주의 중산층이나 독일 통일 운동 세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또한 내셔널리즘이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프로이센 정부와 반드시 상충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제대로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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