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성의 리얼리티는 문학서사와 게임서사의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여겨져왔다. ‘게임 같은 소설’은 다른 소설과 달리 근본적으로 현실과의 관련성을 제대로 모색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사람은 오오쯔까 에이지(大塚英志)였다. 게임은 서사 속 캐릭터의 죽음을 언제나 ‘리셋(reset)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현실의 죽음을 그려낼 수 있는 문학적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루프적 죽음이 죽음의 리셋 가능성을 토대로 작동하는 게임의 일반적인 서사양식이라면, 결말적 죽음은 게임이라는 장르와 무관하게 이야기 내적으로 설계된 엔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가지 필연적인 죽음은 따로 놓고 보면 심상해 보이지만, 하나의 서사 안에서 결합되었을 때는 특별한 결과를 산출한다. 여타의 게임에서 루프적 죽음이 생명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서사의 승리에 가까워지기 위한 도움닫기의 역할을 한다면, 아우터 와일즈에서 루프적 죽음은 결말을 예비하는 방식으로 서사의 패배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삶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소설이 말하고 있는 시간성의 리얼리티일지 모른다.

촛불대항쟁을 통해서는 세대를 이어가며 점점 더 진화된 영혼으로 새 비전을 찾아가는 시민운동을 보았다. ‘이게 나라냐’ ‘내가 나라다’ ‘시민이 예술가다’ 등 촛불을 든 시민의 독창적 구호가 나왔다. 젊은이들의 희망이 담긴 승리의 서사를 성취하는 열린마당, 비전을 창조하는 예술마당, 수평적 연대의 조직마당으로 남녀노소가 광장에 다 모이는 대동문화적 진화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승리의 힘을 체험한 촛불대항쟁은 더욱 성숙한 촛불혁명으로 자라나는 중이다.

굿은 민중의 집단무의식을 원형문화 형식으로 이어오며 민중의 자기 문화정체성을 유지했으며 더 깊은 영성까지 품는 문화이다. 한국에서 굿은 민속문화의 다른 이름이라 해도 된다. 굿은 일제와 서양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 근대 자본국가 권력이 주도세력이 되기까지 비주류문화로 취급되었다. 서양식 근대문명에선 미신, 비문명으로 청산했지만 세계 인류 속에서 엄연히 기층문화로 지금도 살아 있다.

우리 서화 학습은 기본이 몸으로 공부하는 임서모화(臨書摸畵)다. 임서모화란 좋은 글씨는 베끼고 좋은 그림은 모방하는 학습 전통이다. 선생 앞에서 오래전 초화를 받아서 밑그림으로 자기 스스로 습득하는 육화 전승의 필법이다. 바른 자세로 운필력을 얻는 득필이 매우 중요하다.

서양 선은 존재의 ‘있음’ 그 자체를 중시했다면, 동양에서 선은 점에서 시작해서 진행되다가 사라짐으로 끝나는 ‘생성과 소멸’이다. 장지에서 불씨처럼 생성하였다가 물길처럼 소멸한다.

서양의 소묘법은 존재의 실체를 고정시켜 직관한다. 존재 그 자체를 중시해 명암으로 진하게 형상화하니 대체로 어둡다.

인간의 무의식 심층에는 원형문화가 있다. 이를 서양에선 콤플렉스로 보기도 하고 동양에선 귀신으로 보기도 하지만,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에 있는 영성을 인정하는 것은 같다. 이 콤플렉스(귀신)를 다스리는 문화가 문화권마다 다르게 존재하고, 이러한 영성문화를 다 존중하자는 것이 문화다원주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