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젠의 로마사 4 - 희랍 도시국가들의 복속 몸젠의 로마사 4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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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제 전쟁은 불가피했다. 로마는 로마건국 549년(기원전 205년) 마케도니아를 이웃으로 묵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가 아시아의 가장 좋은 땅과 중요한 희랍 식민 도시 퀴레네는 차지하고 중립적 무역 국가들을 탄압하고 권력을 확장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또한 이집트의 몰락과 로도스의 치욕과 정복이 시킬리아와 이탈리아의 무역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동부 지중해 무역을 두 거대 대륙 세력이 좌우하는 것을 로마는 좌시할 수 없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25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1817~1903)의 <몸젠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4>는 해상제국 카르타고의 손발을 끊고 서지중해의 패권장악하는 시기의 로마사를 다룬다. 로마는 제2차 카르타고 전쟁 이후 동지중해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Magnus, BCE 356 ~ 323) 사후 마케도니아, 이집트, 아시아에 위치한 희랍(헬라스, 그리스) 제국을 굴복시키면서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 시기 막강한 해군력을 가졌던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하고, 명장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 ~ 183)과 결전을 벌이며 전략/전술적으로 더욱 완벽해진 로마 육군을 상대로 알렉산드로스의 후예들은 적수가 되지 못하고 굴복하고 만다.


 퓌드나 전투는 또한 동시에 원로원이 아마 이탈리아 바다 너머에서 소유지나 점령군을 갖지 않고 그 무수히 많은 속국을 단순한 정치적 우위로써 통제한다는 국가 원리를 견지하는 최후의 계기를 이루었다. 즉 희랍에서 발생했던 바처럼 속국들이 완전한 무기력 상태나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도 안 되었고, 마케도니아가 의미 있게 시도했던 것처럼, 반자유의 지위에서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가서도 안 되었다. 어느 나라도 완전히 망해서도 안 되고, 자력으로 존립해도 안 되었다. 그리하여 정복된 적은 로마 외교관에게 적어도 동일한, 종종 진정한 동맹국보다 더 나은 지위를 가졌다. 그리고 패한 자는 재기시켜 주었지만, 스스로 재기한 자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이것은 아이톨리아, 아시아 전쟁 후 마케도니아, 로도스, 페르가몬이 다 겪은 바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148


 카르타고 전쟁이 진정한 지중해의 패권을 가리는 승부였다면, 이후 희랍 제국과의 전쟁은 기존의 동맹관계를 맺었던 주변국과의 관계가 지배-복속의 관계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 전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 로마는 비로소 '평등한 동맹의 중심'에서 '패권국(覇權國)'으로 불평등한 관계로 정치/경제적 이익을 로마로 집중시키며 제국의 출발을 알린다. 저자 몸젠은 로마의 헤게모니(hegemony)는 결과적으로 주어졌지만, 본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며 본문의 여러 곳에서 변호(?)한다. 로마는 주변과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에서, 마케도니아가 아테나이에서 로마의 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어쩔 수 없이 그들과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사실이 그럴까? 

 

  로마가 지중해 서부의 정복 후에는 곧바로 동부를 복속시키려 했다고 종종 사람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로마가 이 시기에는 결코 지중해 나라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고 아프리카와 희랍에서 위험하지 않은 이웃들을 가지는 것만으로 만족했다는 사실은 우둔한 편견이 없다면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24


  로마인들은 항상 자신들이 정복 전쟁을 추구한 적이 없으며 언제나 자신들이 공격받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상투적인 언명이 아니었다. 로마가 승전 후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의 자기 이익을 위한 절제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 예컨대 히스파니아의 보유, 아프리카에 대한 후견 책임의 인수, 특히 전체 희랍인에게 자유를 부여한다는 이상적인 계획 모두가 이탈리아 정책에 반하는 심각한 오류였다는 사실은 명백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원인은 한편으로는 카르타고에 대한 맹목적인 공포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훨씬 더 맹목적인 희랍의 자유를 향한 열정이었다. 로마는 이 시기에 특히 정복욕을 입증해 주지 않고 오히려 매우 합리적인 정복혐오를 보여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150


 제1차 카르타고 전쟁의 경우 시칠리아의 마메르 용병들의 참전 요청으로, 마케도니아 전쟁에서는 아테나이의 참전 요청으로 부득이하게 참전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전쟁의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 이들 사건에서 훗날 일본이 1931년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을 명분으로 만주로 관동군이 침략해 들어간 만주사변(滿洲事變)이나 1937년 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켰던 사례를 떠올린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로마의 오랜 동맹국 아테나이를 필립포스가 침략한 것을 알리기 위해 아테나이 사절단은 이미 로마로 갔고, 원로원이 이 사절단을 환영하는 모습에서 필립포스는 자신의 앞날이 어떨지 명확히 보았다. 그리하여 필립포스는 곧바로 로마건국 554년(기원전 200년) 봄, 희랍에 있던 군사령관 필로클레스에게 아티케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도시 아테나이를 분쇄하라고 명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29


 이렇게 마케도니아 전쟁 결과 동지중해의 패권 또한 로마에게 넘어가게 된다. 마케도니아 전쟁 후 적대국이었던 마케도니아, 아시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은 카르타고와 마찬가지로 로마와 불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 형성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랜 기간 제2차 카르타고 전쟁에도 흔들림없이 로마를 배신하지 않았던 라티움 동맹은 물론,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도 평등은 무너지고 불평등한 관계가 성립되며 사회 전반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평등'에 대한 위협, 그것은 '자유' 때문이었다.


 수동적 로마 시민권의 철폐 그 자체는 비난할 것이 못될 뿐더러 동기 면에서도, 나중에 언급할 다른 사항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중간의 매개 고리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라티움 공동체들과 여타 이탈리아 공동체들 간 격차 소멸은 훨씬 더 우려스러웠다. 로마 권력의 토대는 이탈리아 내에서 라티움 민족의 차별적 우위였다. 라티움 도시들이 친족 공동체인 강력한 로마의 우월한 지배에 참여하지 못하고 이제 본질적으로 로마의 신민으로 생각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모든 이탈리아인이 이런 상태를 더는 참지 못하게 되면서, 로마 권력의 토대는 무너졌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179


  옛 시민체 내부에서는 무제한의 평등이 지배했다면, 새로운 국가체제는 처음부터 시민의 권리, 시민이 가진 사용/수익권에서 특혜를 누리는 원로원 가문들과 여타 시민 대중과의 구별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토지귀족의 폐지와 시민 평등의 형식적 확정으로 새로운 귀족이 형성되었고 그에 상응하는 반대당파도 형성되었다(p152)... 그러나 이 내적 발전은 큰 전쟁들과 전승에서 무기의 소음 때문에 들리지 않았고, 그 형성 과정은 로마 역사 중 다른 어떤 과정보다 눈에 띄지 않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153


 로마 원로원은 해외 속주로부터 저렴한 가격으로 곡물을 수입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다. 오늘날 미국이 석유와 달러를 연동시킨 '페트로 달러(Petro-Dollar)'를 기반으로 트리핀 딜레마(Triffin's Dilemma) 문제를 풀 해법을 찾아낸 것처럼, 과거 원로원들은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보다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주변부를 수탈해서 중심부로 부를 집중시키는 그들의 의도는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하도록' 해서 빨대효과를 유발했으며, 농토에서 유리되기 시작한 시민들에게 '노동없는 사회'를 실현시켜 정치적 무관심을 만들어냈다. 초창기 근검/절약하던 전통과는 달리 스포츠에 열광하는 생각없는 대중의 원형을 우리는 이 시기에서 발견한다.


 이탈리아의 해외곡물 수입에 유리하도록 속주들에게 수출 금지가 부과된 것으로 보인다. 시킬리아로부터 상당량의 곡물 수출이 로도스에게 특별한 혜택으로 허락된 것 말고는, 통상 속주의 곡물 수출은 이탈리아로만 자유로웠고 그리하여 해외 곡물은 모국 로마의 독점 상태에 있었다... 이로써 이탈리아 곡물 생산의 이익 원천이 완전히 없어졌고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곡물과 곡물 경작지가 거의 무가치하게 된 사실을 너무나 명백하게 알 수 있다(p232)... 로마 원로원 무리는 선의의 경신(輕信)으로 저렴한 곡물가에서 참된 인민의 행복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스키피오가와 플라미니누스가 사람들에게는 희랍인들을 해방하거나 공화정적 왕권 통제를 행사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이렇게 소규모 토지 소유가 참된 순이익을 더 이상 내지 못한 이래, 농민들은 가망 없이 몰락했다. 이탈리아 농민의 토지가 매입 또는 포기에 의해 대규모 토지 소유로 병합되는지는 시간 문제였을 뿐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233


 계속적으로 조여오는 신의 채찍과도 같은 한니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군중심리를 활용하여 원로원은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며, 이른바 우민정책(愚民政策)을 실행한다. 희랍 세계 정복 전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아 제공되던 서커스는 검투경기였고, 희랍세계 정복 뒤에는 메난드로스( Menandros, BCE 342 ~ 291) 등의 희극(정치색이 배제된)으로 바뀌어 간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네로(Nero, ACE 37 ~ 68)시대 콜로세움에서 행해졌던 검투경기가 전형적인 황제정의 문제라 여겨지지만, 실상을 알고보면 원로원 정치라는 내각제 제도에서 그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조금은 리뷰의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지만, 황제정과 원로원정 이들 중 어느 것이 더 다수의 뜻에 부합하는 정체(政體)일까.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E 106 ~ 43)가 그토록 칭송했던 원로원의 공화정을, 콜로세움에서 민의(民意)에 따라 검투사의 생사를 결정해야 했던, 민중의 눈치를 봐야 하는 황제정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만 하고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자.


 아폴로 제전의 첫 축제에서 시민들은 축제 중에 징집 명령을 받았다. 이탈리아 특유의 미신적 공포는 병적 흥분상태에 빠졌고, 시뷜라 신탁과 예언을 유통시키고 그 내용으로 대중을 모으려고 그런 공포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민들에게 엄청난 희생을 기대해야 했던 정부가 의도했다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한 번 양보한 것은 계속 그렇게 된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192


 나라는 현저하게 쪼그라들었고 자유 시민들의 공동체는 해체되어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으로 분화되었다. 시민과 동맹세력들을 살육하고 황폐화시킨 것이 우선은 카르타고와의 두 장기전이었지만, 로마의 자본가들 역시 하밀카르나 한니발처럼 이탈리아 인민의 힘과 수를 감소시키는 데 기여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258

 

 문학사가는 로마 희극 작가들의 주목할 만한 재능은 인정할지라도 그들의 번역 작품 목록에 예술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순수한 업적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역사적/풍속적 판단은 필연적으로 훨씬 더 가혹할 것임에 틀림없다(p326)... 정부에 의한 연극 규제의 정치적 중립성과 도덕적 위선은 로마 국민이 무서운 속도로 해체되는 데 상당 부분 기여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328


 <몸젠의 로마사 4>에서 희랍 도시국가들이 복속되는 과정 중에 비운의 명장 한니발은 도피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의 죽음이 애석하게 느껴지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가 바알 신 앞에서 한 맹세는 그의 죽음 이후 지켜졌다고 생각한다. 한니발의 군대는 자마에서 전멸했지만, 그가 승자 로마를 향해 던진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의 사과'는 <일리아스>에서 파리스의 트로이에게 멸망의 비운을 던진 것처럼, 로마 공화국의 기반을 송두리째 붕괴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가 남긴 공포는 공화국 로마가 다시는 이전 체제로 돌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 수백년 동안 수많은 로마시민들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고, 훗날 원로원 의원들 스스로 황제의 제관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넘기는 기반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승리라 생각한다. 마치 13세기 유럽 기사들의 중장갑 사이로 칼날을 집어넣어 그들을 무력화시켰던 몽골기병처럼, 한니발의 복수는 예리하게 공화국 로마의 약한 고리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로마 제국을 상대로 이 정도의 승리를 거둔 이는 기독교의 사도 바오로(Paulus, ACE 5 ~ 67)가 있을 뿐이다. 다만 바오로의 기독교는 정신적으로 제국의 사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최초 외부생물체였다가 세포로 흡수되었다는 점에서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를 떠올리게 한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이제 <몸젠의 로마사 5>에서는 한니발이 던진 불화의 싹이 조금씩 자라게 될 것이다...


 당시 막 시작된 선동이 개입된 상태에서, 정부 또는 개별 관리가 정한 시장가격보다 싼 이런 예외적이지만 아마도 매우 빈번했던 곡물 분배가 이후 곡물법들의 맹아가 되었다. 그러나 해외 곡물은 이런 예외적 통로로 소비자에게 도달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이탈리아 농업을 해쳤다. 해외 곡물이 이탈리아반도로 흘러들어 반도 생산물의 가격을 낮춘 것은 이미 자연스러운 사태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230


 사실상 그 전투(퓌드나 전투)가, 문명화된 나라가 전장에서 로마와 동등한 강국의 지위에서 로마와 대립했던 마지막 전투였다. 그 후의 모든 투쟁은 반란이거나 로마-희랍 문명권 밖에 있던 이민족, 이른바 야만인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4>, p148



주권체 민회의 근시안적 결정은, 로마가 승전을 통해 얻은 광범위하고 난해한 대외 관계들을 처리하는 데 민회가 부적합한 기구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민회는 국가 운영에 엉뚱하게 개입하여 필연적인 군사 조치들을 변경했고, 더욱 심각한 것은 민회가 라티움 동맹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 P31

에우메네스는 개인적으로 로마로 가서 원로원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그때 원로원은 양심의 가책을 받은 듯 급작스레 왕들이 이제는 로마로 올 수 없다고 결정하고, 에우메네스에게는 브룬디시움으로 이 원로원 결의를 알려주기 위해,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의하기 위해, 또 그가 떠나기를 로마인들이 바란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재무관을 한 명 보냈다. 왕은 오래 침묵했다. 그는 어중간한 자유 동맹의 시대는 끝나고, 무력한 복종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깨달았다. 로도스인들에게도 상황은 유사하게 전개되었다. - P140

역사적 정의는 여기에서 밀집방진에 대한 로마 군단의 군사적 우월함이 아니라 고대 민족들간의 필연적인 사태 발전이 좌지우지했고, 그리하여 순전한 우연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불변의 운명이 실현된 것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 P150

원로원의 통치가 타락할 수 있다. 하지만 인민 집회들은 통치능력 자체가 아예 없다. 본원 시민 집회를 사악한 다수가 지배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민회에서는 통상 저명인사의 언사가, 명예의 큰 외침이, 곤궁함의 더 큰 외침이 청허되었고 심각한 중상과 명예훼손이 회피되었다. 일반적으로 대중은 자신의 의지 없이 가장 가까운 충동에 따르기에 경솔과 우연이 결정했던 것이다. - P213

로마 발전의 정점은 문학이 없던 시기이다. 로마 민족성이 해체되고 희랍적/세계시민적 경향이 관철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러한 경향에 뒤따라 로마에서 문학이 등장했다. 그리하여 원래부터 어쩔 수 없는 내적 필연성에 따라 희랍적 토양 위에 있었고 특수한 로마적 민족의식과 확연히 대립하고 있었다. - P294

무엇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 문학적 효과는 시대적 경향으로 대체된다. 직접 일상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철저히 정치적 문제보다 사회적 문제에 주목한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의 내적 결론에서 동시대의 정치적/철학적 급진주의와 일치했고 옛 아티케의 민족성을 해체시키는 새로운 세계시민적 인도주의의 최초 최고의 사도였다... 아티케 신(新)희극은 에우리피데스를 희극에 옮긴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다. 그리하여 결국 옛 헬라스가 새로운 헬라스에 양보할 수록 이 시인의 명성과 영향력은 점점 더 올라갔고, 이집트나 로마 같은 외국에서 대체로 희랍 문화는 직간접적으로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규정되었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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