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말까지 푸거가는 대금업, 광산업, 무역업, 제조업을 운영하면서 원료 구입에서 완제품 생산, 가공까지 모두 장악하고, 유럽의 군주, 도시, 교회 등에 중요한 자금 공급자가 되었다.

30년전쟁은 수공업의 전환기였다. 전쟁 이전 시기에 수공업은 주로 군수품과 사치품 생산에 치우쳤다. 전쟁 이후 사치품 수공업은 정체하고 식품 가공, 의복, 가구, 건축 분야, 피혁, 목재 등의 생산도구 제작 분야의 수공업만 명맥을 유지했다. 제품 종류와 수량은 격감하고 품질은 조잡했다. 수공업이 쇠퇴하자 각 영방국가와 도시는 적극적으로 중상주의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기사 영주들이 농업 기업가(구츠헤어)로 성장하면서 그룬트헤어샤프트와는 다른 형태의 구츠헤어샤프트Gutsherrschaft(농장 영주제)가 성립되었다. 이 영주들의 후예가 바로 프로이센의 융커Junker 계층이다.

18세기의 융커 귀족은 프로이센 국가와 사회를 지배한 집단이자 농민의 주인이었다. 귀족 간 대립은 없었고 관직 매매 등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토지(농장) 소유자가 사망하면 토지는 그 소유자의 자식에게 분할되었으므로 토지 규모는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다.

16세기부터 농업 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봉건영주들은 주인 없는 땅을 점유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소유 토지를 확대했다. 영주가 농민이 보유한 토지를 회수하거나 합병하는 일도 일어났다(16세기 후반). 생산과정 특화와 집약화가 발생하고 농업이 발전했다.

17세기는 인구 증가가 정체하던 시기였다. 인구는 적정 수준을 넘을 정도로 증가하는데 농업기술 진보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못하여 평균 농업 생산성이 정체되거나 심지어 감소했다. 이런 현상은 지역에 따라 다양했는데, 이로 인해 엘베 강 동부와 도나우 강 북부에서 인신적 속박이나 예속이 강화되는 일이 일어났다.

농촌에서 살아남은 융커는 생산성이 높은 대규모 농장 주인으로 변모했다. 이들은 동료 귀족의 농장을 구입하거나 농민 소작지를 추가하여 토지 규모를 넓혀갔다. 1880년대에 1,000헥타르 이상의 대규모 농장 소유주의 70퍼센트가 귀족이었다.

유능한 관리 양성과 부의 형성이 절실한 영방군주로서는 새로운 대학이 필요했다. 예컨대 1694년 프로이센 대공국에 할레Halle 대학이 창설되었다. 할레 대학은 영방 가운데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대학으로, 설립 목표는 현실에 유용한 강의, 라틴어 대신 독일어 사용 등을 추구하며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괴팅겐 대학은 중세적, 현학적 태도에서 벗어나 계몽적, 합리적 성격의 대학관을 펼침으로써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교과과정을 운영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프로이센의 독일통일 운동은 한마디로, 서유럽 나라들이 팽창할 때 독일 지역이 서유럽 나라들의 군사적 압박을 받고 한동안 고전하다가 마침내 독일의 변방 브란덴부르그-프로이센이 도시 자치권을 제압하고 군국주의적 성격이 강한 강력한 절대왕정을 세우고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잡아가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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