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젠의 로마사 3 - 이탈리아 통일에서 카르타고 복속까지 몸젠의 로마사 3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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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재정 측면에서 카르타고는 고대 세계 국가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 이 페니키아 도시는, 희랍 최초 역사가의 증언에 따르면, 모든 희랍 국가를 재정 측면에서 압도했으며 페르시아와 재정수입 측면에서 맞먹었다. 폴뤼비오스는 카르타고를 세계 최고의 부국이라고 불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25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1817~1903)의 <몸젠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3>는 천신만고 끝에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 앞을 가로막은 북아프리카의 강국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다룬다.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E 70 ~ 19)의 <아이네이스 Aeneis>에서 서술되는 카르타고 여왕 디도와 로마의 선조 아이네이아스와의 악연처럼, 이들은 서(西)지중해 패권을 두고 치열한 다툼 끝에 결국 카르타고의 복속으로 마무리되는 역사가 <몸젠의 로마사 3>의 배경이다.


 카르타고는 농업 경제보다 자본 경제를 중요시했으며, 당시 로마에서는 자본 경제보다 농업 경제를 우선시했다. 카르타고 농민들은 대개 대농장 및 노예 소유자였는데, 당시 로마에서는 대다수 시민이 자영농이었다. 로마의 인구 대부분이 토지 소유자였고 보수적이었던 반면, 카르타고의 인구 대부분은 무산자였기에 부자들의 돈은 물론 민중 선동가들의 개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28


 몸젠은 본격적으로 카르타고 전쟁(포에니 전쟁)을 다루기 전에 이들 두 열강을 비교한다. 이들은 여러 면에서 거의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었다. 육군, 자영농 중심의 로마와 해군, 지주 중심의 카르타고. 전력은 비등하지만, 거의 모든 면에서 상반된 두 나라의 승패가 갈린 것은 자신의 약점이자 상대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는가하는 부분에서였다.


 두 열강의 자원을 비교한 바를 결론적으로 종합하자면, 양국 간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카르타고와 로마가 대체로 대등했다고 판단한 희랍인의 통찰은 객관적이고 정확했다. 하지만 이에 부연되어야 할 것이 있다. 공수를 위해 인력으로 강구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고자 모든 지식과 재물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는 자국 보병을 확보하지 못한 약점과 자립적 토대가 단단한 동맹 세력을 얻지 못한 약점을 끝내 극복할 수 없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36


 로마 인은 카르타고에 맞설 전함을 건조했다. 이것은 놀라운 개가로 이해되어야 한다. 로마의 전함 건조는 민족의 위대한 역사(役事)나 마찬가지였는바 로마 인은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통찰력, 천재적 창의력, 결단과 실행의 추진력으로써 심각한 위기에서 조국을 구했던 것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53


 제1차 카르타고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전쟁 마무리 단계에 이르기까지 용병을 대체할 병역제도 개혁을 하지 못한 반면, 로마는 자신의 약점인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혁신을 수행하면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로마 역시 전쟁을 통해 예상치 못한 여러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많은 시행착오를 했고, 몸젠은 본문에서 로마의 승리가 '단지 적들이 더 많은 실수를 했기 때문'이라고 혹평을 가한다. 그렇다면, 카르타고가 보다 많은 실수를 한 원인은 무엇일까. 몸젠은 그것을 '의지(意志)'에서 찾는다.


 이 전쟁(제1차 카르타고 전쟁)은 다른 무엇일 수 없었는바 그것은, 불만족스러운 이탈리아 정책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제국 정책으로 이행하는 정체 변화의 핵심 사건이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일순간 바뀐다. 이제 전장은 아득히 먼 곳으로 확장되는데, 다른 대륙에 있는 미지의 땅과 광대한 바다를 건너서까지 이어졌다. 모든 바다로 적이 쳐들어올 수 있었고, 모든 항구에 적이 출현할 수 있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83


 새로운 전쟁 체제에서는 군사학의 전문적 식견을 갖춘 군사학교 출신의 야전 사령관이 필요했다. 당연히 시민 대표가 전부 이렇게 될 수 없었다. 함대의 최고 명령권을 보병 최고 명령권의 부속물로 취급해, 최고최선의 시민대표가 야전 사령관뿐만 아니라 제독도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한 일은 더욱 뼈아픈 점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86


 개별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며 무력충돌을 회피했던 페니키아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으로 결집시키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전쟁을 통해 드러난 자신들의 한계를 변화시키는 혁신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 결과 제1차 카르타고 전쟁에서는 변신에 성공한 로마 해군에게 패배하며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제2차 카르타고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칸나에 전투라는 대승리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본국은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 ~ 181) 원정군을 고립시킨 채 방관하고 있었고, 히스파니아으로부터의 보급에만 의지하던 한니발은 점차 쇠약해지다가,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E 235 ~ 183)에 의해 결국 자마에서 굴복하면서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무엇보다 페니키아인이 갖지 못했던 것은 바로 국가 건설의 의지, 자주 독립의 자유를 향한 본능이었다. 시돈과 튀로스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페니키아 땅은 유프라테스 강과 나일 강 유역을 지배한는 열강들에게 영원한 '황금 사과'였고, 따라서 한번은 아쉬리아에, 다음에는 이집트에 복속되곤 했다(p5)... 페니키아 인은 제 땅에서 열강들의 억압을 조용히 감수한 것은 물론 해외에서는 정복 정책 대신 상업 정책이라는 평화 노선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식민지는 무역 거점일 뿐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6


 정리하자면, 몸젠은 <몸젠의 로마사 3>에서 다루는 두 차례의 카르타고 전쟁의 분수령을 '국가 건설의 의지' 유무로 파악한다. 몸젠의 서술대로라면 보다 강한 국가를 희망하는 의지가 있었던 로마의 사회발전정도가 카르타고에 앞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상위단계의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욕구가 사회를 단합시켰고, 이로부터 로마가 카르타고보다 유연하게 위기에 대처하면서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는.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로마의 승리는 로마가 아직 사회적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고, 단순한 승리에의 열망으로부터 얻어진 결과라는. 대지주/농장주 중심의 자본중심의 카르타고 경제와 자영농 중심의 로마 경제는 오늘날 대기업 중심의 경제와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자본주의제도 성격이 강한 카르타고의 경제 체제를 생각해본다면, 카르타고의 경제가 보다 근대화된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한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닌, 오히려 사회의 발전 정도가 앞서, 보다 많은 사회문제가 표출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국내파의 한노(Hanno)가 한니발의 원정에 부정적이었던 사례는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로마의 승리는 보다 열악한 체제에서 앞으로 닥칠 사회문제를 미처 예상치 못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단결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카르타고의 패배는 자본주의 체제와 양극화 문제로 사회 갈등을 겪은 낡은 체제의 종말로, 로마의 승리는 신생국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카르타고 전쟁의 승리를 로마체제의 우수성, 민족의 우수성에서 찾는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카르타고 전쟁 이후 로마는 마치 멸망한 카르타고의 저주에 걸린 듯 심화된 양극화 문제로 극심한 내전 상화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은 이러한 판단에 근거가 되지 않을까. 


 사실상 한니발은 이 전쟁에서 무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달성했다. 저돌적인 적이건 신중한 적이건 그 누구도 그의 주된 작전을 전혀 막지 못했다. 그리고 식량을 획득하는데 어려움도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고 게루니움 부근 숙영지에서 그의 군대는 겨울을 큰 어려움 없이 보냈다. 로마를 구한 것은 소심한 노인이 아니라 이탈리아 연맹의 확고한 결속력과 카르타고 사내에 대한 서방인의 민족적 증오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181


 발발 자체는 확실하지만 시기는 불확실한 전쟁을 목전에 둔 약소국의 경우, 똑똑하고 결단력 있고 헌신적인 사람들은 최대한 유리한 시점에 전쟁을 시작하려 할 것이고 정치적 수세를 전략적 공세로 만회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태하고 겁 많은 돈의 노예들, 노회한 자들, 어리석은 자들 때문에, 오로지 평화 속에 살다가 죽기 위해 시간을 버는 것, 그리하여 최후의 결전은 될 수 있는 한 뒤로 미룰 생각뿐인 자들 때문에 사방에서 생기는 온갖 장애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카르타고에도 주화파와 주전파가 있었다. 물론 두 당파의 대립은 이미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에 존재하던 정치적 대립과 맥을 같이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120


 두 차례에 걸친 카르타고 전쟁 끝에 로마는 이제 서지중해 패권을 장악한다. 그렇지만, 한니발에게 수십 년간 이탈리아 본토를 짓밟힌 로마의 복수는 강화조약에 독소조항을 남기면서, 카르타고는 디도 여왕의 길을 따라 멸망의 길로 떠밀리고 있었고, 이는 4권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아프리카에 대한 로마 정책은 본질적으로 로마의 옹졸하고 근시안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카르타고 국력의 회복을 저지하고 패전국을 로마의 선전포고라는 다모클레스의 칼 아래 묶어두려는 데 있었다. 강화조약은 카르타고 인에게 예전 영토를 그대로 보장하는 한편, 이웃 부족인 마니시사 인에게도 과거 그들이나 그 선조들이 카르타고 영토 내에 가지고 있던 소유권을 보장하도록 규정했는바 이는 사실 분쟁을 막기위해서라기보다 조장하기위해 삽입된 듯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293

여러 개별 사항을 종합해 보면 카르타고의 국가체제는 시민 공동체 내에 살림이 넉넉한 중간 계층은 전혀 없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도시 무산자들과, 다른 한편 대상인 및 대규모 농장 소유주와 상류층 중간 관리인들로 양분된 자본가 정체였다. 예속민을 희생물로 삼아 부패한 귀족들이 재산을 축적하며, 예속 공동체에 세금 징수자나 감시자로 중간관리인들을 파견하는 등 부패한 과두정의 명백한 징표들이 카르타고에도 없지 않았다. - P24

카르타고는 승리의 열매를 독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특권을 가진 도시들에게조차 통상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로마는 원칙적으로 피정복 공동체로부터 자치권을 완전히 몰수하지 않았으며, 세금을 무기한으로 징수하지도 않았다. 반면 카르타고는 모든 곳에 총독을 파견해 옛 페니키아 도시 전부에 세금을 부과했으며 피정복 부족들을 사실상 국유노예로 취급했다 - P31

한니발은 로마의 굴복이라는 최종적 목표가 공포심이나 기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만한 도시를 실제적으로 정복함으로써만 성취된다고 믿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은 고향으로부터 불확실하고 불규칙적인 지원을 받으며 이탈리아에서는 변덕스러운 켈트족에 일단 의존해야 하는 데 반해, 이탈리아 연방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군사 지원에 있어 무한할 정도로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 P167

귀족정체를 취하고 있던 국가체제의 기본 틀을 비판하는 정치적 선동이 이미 이탈리아의 전쟁 수행을 좌우하고 있었다. 귀족이 외적과 음모를 꾸민다는 비이성적인 비난이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정치적 맹신에 의하여 구원자로 불린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가이우스 바로는 둘 다 ‘신인‘이자 순진한 민중의 친구로, 자신들의 게획 실행에 대한 동의를 시장에 모인 군중의 갈채 하에 얻었다. 그 결과가 트라시메누스 전투와 칸나이 전투였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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