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젠의 로마사 2 - 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 몸젠의 로마사 2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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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이탈리아는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다... 로마 인들이 민족적 통일을 이미 이때부터 분명한 목표로 삼았다는 것은 모든 병역의무를 가진 이탈리아 동맹들에 라티움이라는 명칭을 거리낌 없이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위대한 정치적 구조물이 보여주는 것은 이를 설계한 이름 없는 건축가의 대단한 정치적 안목이다. 이 덕분에 그렇게 많고 그렇게 다양한 건축요소들은 하나로 연결되고 연합되어 이후 커다란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견고함을 갖추게 되었고, 이러한 위대한 작품에 성공이라는 인장이 찍히게 되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285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1817~1903)의 <몸젠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2 >는 왕정 철폐로부터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의 로마는 라티움 동맹을 활용하여 에트루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 내의 주변 민족들을 차례로 복속시키며 신흥 강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들에게 항상 승리만 뒤따랐던 것은 아니었다. 갈리아(켈트)인에게 카피톨리움 언덕을 제외한 로마 전역을 빼앗기고 눈 앞에서 로마가 불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때도 있었으며, 삼니움 전쟁과 뒤이은 에페이로스왕 퓌로스(Pyrros, BCE 319 ~ 272)와의 전쟁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칠 뻔하는 등 오히려 멸망의 위기를 해마다 치뤄진 전쟁 속에서 느껴야 했던 불안의 시기이기도 했다.


 알리아 전투 이후 3일째 되는 날, 승자들은 로마의 성문을 지나 도시로 들어왔다. 승자들이 첫날 했던 것처럼 최선을 다했다면 도시는 물론 로마 자체가 망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주 짧은 틈이 주어졌는 바, 로마 인들은 요새에 성물을 숨기거나 땅에 파묻고 훨씬 더 중요한 일인 농성을 채비하고 생필품을 준비할 수 있었다(p135)... 켈트족은 철수의 대가로 몸값을 요구했다. 켈트족이 칼을 조롱하듯 던지며 칼의 무게만큼 황금을 바치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이런 사정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야만족의 무력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내 승리를 팔아버렸고, 팔아버렸기 때문에 결국 승리를 놓치고 말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136


 로마에 확고한 중심 도시를 둔 라티움 종족은 그들의 지배권을 이곳으로부터 사방으로 천천히 확장했으며, 물론 상대적으로 협소한 지역에서이긴 하지만 그들이 발을 내디딘 곳에 확실한 발자취를 남겼는바, 부분적으로 로마화된 복속 도시를 건설하는가 하면 정복 지역을 완전히 로마화했다. 그러나 삼니움은 전혀 달랐다. 삼니움에는 구심점이 되어 전체를 이끌만한 공동체가 없었으며, 그렇기에 정복과 관련한 어떤 정책도 존재하지 않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168


 로마군은 불패(不敗)를 자랑하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Magnus, BCE 356 ~ 323) 대왕의 군의 용맹함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매우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대응을 보여주고, 거듭된 패배에서 오히려 단단해지는 모습을, 상대는 이길수록 약해지면서 결국 로마의 승리로 끝나는 일종의 공식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이 이들을 단단하게 결속시켰고, 이어지는 치명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최종 승자로 만들었을까.  


 로마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고 승리를 완벽하게 이용했다. 삼니움 종족이나 타렌툼 인들, 그밖에 멀리 떨어져 사는 종족들에게 너그러운 조건을 제시한 것은 정복자의 관용이 아니라 영리하고 분명한 계산 때문이었다. 로마의 최우선 목표는 최근 전쟁 기간 동안 캄파니아와 아풀리아에 군사도로와 요새를 설치함으로써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하기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는바, 이제 이를 보강하고 완성함으로써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를 군사적으로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202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로마 체제가 가진 구조적 불안정성때문라 여겨진다. 구시민층을 위한 공공토지정책과 거듭된 전쟁 등은 로마 중산층을 파멸의 길로 내몰고 있었고, 이들의 쌓이는 분노는 계속된 제도 개선의 요구로 이어졌다. 그 결과 12표법과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 등의 과정을 통해 혈통귀족의 기득권의 많은 부분이 소멸되기에 이른다. 일부 역사가들(그리고 소설가들)은 귀족-평민의 극적 화해가 초창기 로마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해석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귀족-평민의 화해와  개선의 성과가 과연 평민(상민)의 삶에 실질적인 개선이 되었다면, 훗날 그라쿠스(Gracchi) 형제의 개혁이 그토록 큰 파장을 가져올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라쿠스 실패 이전에 오히려 개혁의 실패가 있었고, 앙시앵 레짐의 문제는 후대로 넘겨졌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중간 또는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은 삼중의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는데, 시민이 가지는 공동 사용권을 갖지 못했고 공유지에서 발생하는 사용료가 제대로 징수되지 않음으로써 세금 부담이 가중되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무산자들에게 제도적 탈출구였던 토지 분배의 기회조차 봉쇄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아마도 이때 이미 초기 형태의 거대 농장 경영이 도입되어 의존 농민들이 쫓겨나고 노예들이 토지를 경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모든 정치적 착취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었다. 더 나아가 목숨마저 앗아가는 힘겨운 전쟁의 발발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과도한 전쟁세 및 그 외 부역들은 그들의 최후 숨통을 조이게 되었고, 결국 그들은 자기 농지에서 쫓겨나 과도한 부채로 인해 사실상 변제할 때까지 채권자의 예속 농민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38


 로마 혈통귀족과 상민의 투쟁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귀족들은 광범위한 특권 가운데 집정관직 한 자리와 호구감찰관직 한 자리만을 사실적으로 유지했던 반면, 호민관과 상민안찰관에서, 집정관과 호구감찰관 각각 한 자리에서 법적으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법적으로 민회 의결에 준하는 상민회 의결에 참여할 길 또한 법적으로 차단되었다. 왜곡되고 고집스러운 저항이 법적으로 처벌됨으로써 과거의 귀족 특권은 그만큼 귀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로마의 혈통귀족들은 당연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공허한 이름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84


 몸젠의 <로마사>에서는 혈통 귀족에 대항한 상민귀족-상민의 연합 세력이 승리를 거두면서 로마 지배층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훗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갖는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한계처럼, 대중과 유리된 상민귀족들만을 위한 개혁은 기껏해야 불만의 폭발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로마 건국 387년(기원전 367년) 상민귀족과 농민 두 부류의 연합은 귀족을 타도한다는 목표를 완전히 성취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그러한 성취가 과연 두 부류에게 동일하게 이로운 것이었는가와 새로운 질서로써 실로 사회 위기가 관리되고 정치적 평등이 실현될 수 있는가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85


 혈통귀족이 아닌 유복한 상민 집안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중과는 멀어진 채, 원로원 의원들과 대등한 권리를 누려왔고 매우 빈번하게 대중에 반하는 정책을 따르면서 혈통귀족을 편들었다. 리키니우스 법은 귀족 내의 법률적 차별을 해소하여 상민을 정치로부터 배제하던 영원불멸의 법적 장벽을, 사실 뛰어넘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닌 장애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이러저런 경로로 로마의 지배계급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93


 몸젠은 <로마사>에서 로마 공화정을 인류가 갖는 가장 이상적인 정체(政體)로 극찬한다. 진정한 철인(哲人)들에 의해 주도되는, 형식상 행정기관인 집정관과 형식상 의결기관인 민회를 뛰어넘는 집단지도체제를 빠른 성장의 근원으로 몸젠은 해석하지만, 여기에 토지를 갖지 못한 평민들의 자리는 없었다. 혈통귀족들은 계속된 개혁 요구에 끊임없이 양보하는 듯 했지만, 양보는 형식일 뿐 실질권력은 원로원에 집중되는 모습을 통해 지배권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당대의 평민과 귀족들 그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새로운 원로원 통치는 기존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긴 했지만 그래도 옛 공동체에 대한 완전한 변화를 담고 있었음은 명백하다. 시민의 자유로운 활동이 저지되고 경직되었다는 점, 정무관들은 회합의 주재자와 집행위원회로 전락했다는 점, 심의 기능만 있던 원로원이 두 헌법 기관들의 지위를 승계했다는 점, 원로원이 미미한 형태이긴 하지만 공동체의 중앙정부가 되었다는 점 등은 가히 혁명적 권력 찬탈이라 할 수 있다(p111)... 로마 원로원은 국가를 상징하는 가장 고귀한 존재로서 일관성과 현명함, 통일성과 조국애, 견고한 권력과 전제정의 기운을 공화정의 헌신으로 연결시킬 줄 알았던 '왕들의 회합'이었다. 원로원으로 대표되던 전성기의 로마는 대외적으로 역사상 어떤 나라보다 확고한 위엄을 갖춘 모습을 보여주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112


 아마도 귀족들은 통치 권한은 내줄지언정 이에 따르는 명예, 다시 말해 세습적 명예는 내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이를 상민들에게 허용할 수밖에 없었을 때는 사실상의 공동체 최고 관직을 법적으로는 최고의석에 앉을 권한이 아닌 단순히 지휘봉을 잡는 사령관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이런 명예가 단순히 한 개인에서 끝나게 했을 것이다... 귀족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은 상민들에게 집정관의 권한은 주되 집정관직 자체는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70


  많은 이들이 정치적 문제에는 무관심하더라도, 먹고사는 경제 문제에 민감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평민들의 불만사항은 조금도 해결되지 못했다. 농사지을 토지에 대한 수요는 많지만, 공급은 부족한 상황. 무주택자와 다주택자가 공존하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처럼 당대 로마 원로원이 마주한 문제는 결국 부동산(토지)문제라 하겠다. 한정된 재화인 토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공급확대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결국 정복전쟁의 형태로 구현되는 것이 이 시기 로마의 이탈리아 정복전쟁이었다. 


 이탈리아 중부에서의 로마의 패권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아이퀴 인들과 헤르니키 인들의 정복이 제1차 삼니움 전쟁의 결과였던 것처럼 제2차 삼니움 전쟁의 결과는 삼니움의 정복이었다. 삼니움 종족을 최종적으로 정복했던 지휘관 마니우스 쿠리우스는 같은 해(로마 건국 464년 , 기원전 290년)에 삼니움의 짧은 저항을 무너뜨리고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정복된 영토의 대부분은 바로 승리자의 소유가 되었고 로마 시민들에게 분배되었다. 쿠레스, 레아테, 아미테르눔, 누르시아와 같은 공동체에는 투표권 없는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212


 그렇지만, 로마는 이 문제를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 도시 국가 로마 내부의 귀족-평민의 싸움을 이탈리아 반도 전쟁으로 무마시켰고, 라티움 연맹과의 불화를 이어지는 삼니움 전쟁, 퓌로스 전쟁으로 덮고 지나가지만 로마 체제가 가진 불평등 - 내부적으로는 평민, 외부적으로는 라티움 동맹 - 문제는 만기일만 연장되었을 뿐 전혀 상환되지 못했음을 우리는 역사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로마 건국 370년(기원전 384년)부터 라티움 연맹은 폐쇄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의 법에 따르면 로마와 라티움이 건설한 모든 주권 도시는 연맹 축제와 연맹 의회에 참여할 자격을 가진 공동체로 받아들여졌으며, 이와 반대로 다른 도시에 병합된 모든 도시 및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공동체들은 연맹회원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라티움 관습에 따라 30개 공동체의 숫자는 언젠가 한 번 확정된 이래 그대로 유지되었고, 참여 도시들은 의결권을 30개로 유지하여 이보다 더 늘리지도 줄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들어오는 공동체들과 미미한 역할 혹은 저지른 비행 때문에 자격이 박탈된 공동체들은 의결권을 갖지 못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160


 우리는 <몸젠의 로마사 2>로부터 갈리아인, 삼니움 족과의 전쟁 등으로 위기에 빠져서도 극복해 나가는 로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싸울수록 강해지는 마치 전쟁기계와도 같은 모습은 당대인들에게는 공포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승리가 로마 체제가 갖는 불안정 속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승리의 대가임을 강조하는 혈통귀족 중심의 원로원 의원들과 영화 <Far and Away>에서 달리는 거리만큼 자신의 땅이 된다는 생각으로 적진을 향해 돌진했을 농민들을 부추긴 결과임을 생각해본다면 조금은 연민의 감정으로 이들의 역사를 볼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로마의 넘볼 수 없는 정치적 우위는 우선 군사제도의 탁월함 때문으로, 그 탁월함은 본질적으로 제3진 예비부대 제도, 근접전과 원거리 공격의 결합, 공격과 방어의 결합이라는 세 가지 커다란 군사적 원칙에 기인한다. 예비부대 제도는 이미 일찌감치 투입되었던 기병대에서도 엿볼 수있는데, 군단을 세 개의 진으로 나누고 노련한 병사들로 구성된 제3진 예비부대를 최후의 결정적 공격을 위해 유보해 둠으로써 완성되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301 


공동체의 수장은 어떠한 권력이 그에게 부여되는지 불문하고 일정 기간 이상 최고위직에 머물지 못하면 결코 정치적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지배의 필수 조건은 지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신직인 원로원이, 특히 주로 정무관을 모든 측면에서 자문할 권한을 가진 좁은 범위의 구시민만이 아니라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상민들을 포함한 원로원이 1년 임기의 통치자에 대하여 실제로는 역전된 권력관계를 갖게 되었는바, 원로원은 본래의 통치권을 획득했고 통치자는 원로원의 의장이자 사무총장으로 강등되었다. - P28

사람들은 하나의 기이한 관직을 창설했고, 그 관직의 역할은 하층민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지만 이에 필요한 경제 개혁은 추진할 수 없었다. 호민관은 정치적 지혜의 증거가 아니라 부유한 귀족과 지도자 없는 민중의 어정쩡한 타협이었다. 사람들은 호민관이 로마를 독재정으로부터 지켜냈다고 말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독재정으로의 국체 변화 자체가 민중에게 재앙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로마 시민들에게는 독재정이 너무 늦게, 국가의 물리적, 정신적 여력을 모두 소진한 뒤에 왔다는 것이 재앙이었다. - P51

원로원이 매년 직무 영역을 확정하여 곧바로 경합하는 관리들에게 분배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문과 요청을 통해 인사 문제에 결정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가 되었다. 극단적인 경우, 원로원이 직무 문제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민회 의결에 간여하기도 했는데, 물론 정부가 이런 식의 문제 해결을 택한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더 나아가 예컨대 강화조약 체결과 같은 아주 중요한 사안의 처리는 집정관의 권한에서 배제되었고, 집정관은 다만 원로원에 조회하고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처리하도록 강제되었다. - P101

희랍인들의 놀랍고 강력한 전쟁 수행력과 사령관의 천재성만 놓고 보면, 그들은 헤라클레이아와 아우스쿨룸의 승전과 같은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승리를 거둘 때마다 이어질 전쟁에 소요될 왕의 자원은 줄어든 반면, 로마 인들은 점차 자신들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느끼면서 인내하며 최종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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