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으로 그리스인은 인간 정신을 집단의 정신 구조에 매몰된 형태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인간’으로 의식하는 문화를 이룩했다. 무엇보다도 이는 고대 그리스비극의 주제와 여러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로마인은 중세의 조건부 토지 보유가 아니라 무제한적 사유재산 개념을 만들었으며 이는 근대 이후 서유럽에서 사유재산제도와 자본주의 발생에 기여했다.

로마 공화정은 대토지 소유와 대규모 노예제 생산방식을 대대적, 조직적으로 결합시켜 광대한 대토지를 운영하는 능력을 보였다

분업의 문제점과 시장가격에 미치는 인플레이션의 영향 등을 해석할 분석 도구를 개발하지 못한 로마인은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장이 사라진 도시에서 도시의 장인도 버틸 수 없었다. 분업이 시들해지고 도시들이 몰락해갔다. 결국 자급자족적 장원villa이 출현했으며 이것은 중세 장원의 한 기원이 되었다.

경제적인 면에서 로마 민법의 부활은 토지의 조건부 보유가 절대적 사유권으로 이행하는 움직임, 상업의 발달 등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는 도시와 농촌의 자유로운 자본 성장에 도움이 되었고 서유럽에서 자본제 출현에 필수적이었다

15세기 중엽부터 서유럽에서는 상업도시가 위기 극복의 힘이 되었다. 서유럽 도시들에서 일어난 일련의 기술 진보, 즉 금은 분리법, 환금작물 생산의 증대, 청동제 대포, 인쇄술, 조선술 혁신 등, 서유럽 르네상스의 토대가 된 이들 기술혁신은 모두 15세기 후반에 몰려 있다.

원거리 무역이 부활하면서 운송 과정에서 배의 난파, 해적, 노상강도 등을 만날 위험도 커졌다. 자본 투자 규모와 위험부담도 매우 컸으므로 원거리 무역은 전문 상인만이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동맹을 맺어 서로를 보호할 체계를 구축했다

14세기 왕들은 징세만으로는 수입이 부족한 지경이었다. 그래서 대상인에게서 돈을 빌렸다. 상인들은 이에 따르는 위험부담을 감안해 금리 이외에 각종 특권을 요구하고 실제로 이를 얻어냈다. 교황청과 합스부르그 왕실에 돈을 댔던 푸거Fugger가가 그 특혜로 헝가리, 티롤 지방의 은, 동광을 확보하여 16세기 전반에 전성기를 맞이한 것이 대표적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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