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역사학자들은 독일이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국민 국가로 통일되지 못한 이유를 심사숙고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거대한 땅덩어리가 주권자가 여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는 점을 한 가지 확실한 이유로 들 수 있다.

막시밀리안은 3편의 자서전적 우화를, 개별 지식 분과의 정수를 뽑아내서 여러 권의 백과사전을 만들기 위한 대규모 편찬 사업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다. 백과사전의 각 부에는 요리, 승마술, 매 훈련법, 원예학, 포술砲術, 펜싱, 도덕률, 성채와 도시, 마술(흑마술도 포함된다), 연애 기술 등과 관계있는 모든 지식이 요약될 예정이었다.

막시밀리안의 미래상은 현실과 동떨어졌고, 그럴듯하지도 않았다. 그는 치세 내내 야심에 비해서 수입이 부족했다. 프랑스의 왕들이 매년 수백만 두카트의 수입을 올리던 시절, 막시밀리안은 그의 중앙 유럽 영지에서 겨우 약 60만 두카트를 거둬들였다.

개혁가들은 대부분 신화적 과거를 되돌아보았고, 통치자와 제후들의 공동 지휘 아래에 정의가 지배하는, 신이 정해놓은 상태가 재확립되기를 꿈꾸었다. 반면 막시밀리안은 군대 양성과 자금 확보라는 관점에 입각한 조율에 관심이 있었고, 개혁가들이 꿈꾸는 방식의 권력 분점을 꺼렸다.

카를은 재정적 절박성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돈이 필요했고, 카스티야의 군주로서 의회의 동의 없이 다양한 세금을 징수할 권리가 있었다. 그렇게 거둬들이는 세금은 그의 모험을 뒷받침하는 데에 할당되거나 대출의 담보로 제공될 첫 번째 수입원이었다. 세금 다음으로 그가 기댄 것은 카스티야 의회가 특별히 통과시키는 자금이었는데, 그 돈을 이용하려면 일단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카를은 정치적 기반도 미리 준비해두었다. 종교 전쟁을 선포하는 대신, 차지할 자격이 없는 영토를 점령하고 있다며 개신교 제후들을 압박한 것이다. 그러자 적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덕분에 카를은 1547년에 뮐베르크 전투에서 주요 개신교 제후들을 상대로 놀라운 승리를 거둘 발판을 마련했다.

카를은 일단 아들인 펠리페가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 자리에 오른 뒤에 나중에 페르디난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훗날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
재위 1564-1576)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 방식을 고집했다.
그 결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이 최고로 커졌을 때조차 가문의 판도는 양분되었고, 스페인 쪽은 카를의 아들인 펠리페가, 중앙 유럽 쪽은 카를의 동생인 페르디난트가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끊임없이 신화를 수집하고, 영묘를 만들고, 옛 로마인의 방식으로 승리를 과시했지만, 그런 활동은 더 이상 무의미한 자기 선전이 아니었다. 오히려 거기에는 카를이 보름스 제국 의회에서 말한 바와 동일한 목적(왕가 차원에서 신앙을 수호하는 것)이 점점 더 많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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