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가문은 과거에 왕을 선출하는 과정에 몇 번 참가했었지만, 새로 정해진 선거인단에서 빠지면서 신성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헌정 문서에서 누락되었다. 카를 4세는 의회의 향후 회합에 대비하여 직접 마련한 좌석 배치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을 선제후들과 고위 성직자들, 제국의 고관대작들 다음인 두 번째 열에 배치함으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위가 강등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알브레히트가 오스트리아에 장기간 머문 덕분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당시의 어느 연대기 작가로부터 "오스트리아인들"로 묘사되었다. 그것은 오스트리아인들이라는 용어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가리키는 데에 쓰인 첫 번째 사례였다. 과거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섭정을 통해서 오스트리아를 다스렸지만, 이제는 슈바벤의 영지 덕분에 총독을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돌프의 업적은 한층 더 미묘한 것이었다. 루돌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들에게 역사의식과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덕분에 그들은 단순한 혈족 집단을 뛰어넘게 되었다.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과거를 상상으로 꾸며내고 대공의 관과 대공이라는 칭호를 창안한 데에 힘입어 후계자들 사이에서 연대감과 목적의식이 생겼고, 연대감과 목적의식은 각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 더 깊숙이 각인되었다. 다른 가문 사람들은 당대의 황제 덕택에 선제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겠지만,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힘입어, 그리고 역대 황제들이 몇 세기에 걸쳐 인정해준 특권에 힘입어 높은 지위에 올랐다.

영주의 통치권은 정치적 공동체 의식을 유발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각 영지에서 피지배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 출현했다. 이러한 정치 공동체들은 14세기 말엽부터 의회를 열어서 통치자와 정책을 토론했고, 증세를 둘러싼 권리를 증진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상속권 문제를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면 의회는 합의를 종용했고, 당사자들의 주장을 중재하기 위한 위원들을 임명했다.

AEIOU라는 두문자어와 성 게오르크 예배당 서쪽 벽의 문장, 그리고 급성장세의 연대기 문학은 모두 동일한 주제를 가리켰다. 오스트리아는 그저 하나의 지역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통치자들은 위대해질, 그리고 사람들을 다스릴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바로 그런 땅이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땅이 아니라 제국, 사명, 상속, 운명 같은 여러 주제들이 한데 모인 후천적 구성물이었다. 브란덴부르크나 작센처럼 다른 통치자들이 속한 가문의 이름은 주요 영토의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달랐다. 오스트리아는 지리적 요인과는 별개로 성립된 통치 가문을 향한 일련의 믿음이 특징인 곳이었다.

15세기 초엽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제의 옥좌에 도전할 가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493년에 프리드리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55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로 군림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실처럼 보였다. 그들은 역사를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바야흐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과 신화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은 위대함을 향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1437년, 프리드리히가 세계 제패의 뜻을 담아 비망록에 남긴 AEIOU는 허영심이 묻어날 뿐 아니라 어리석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490년대에 이르러 그것은 믿을 만했고, 실현을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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