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극장 2 - 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 하이데거 극장 2
고명섭 지음 / 한길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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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형이상학에서는 결국 존재자가 존재의 척도이자 목표이고 실현이 된다. 존재자가 존재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자를 전제하고서 이 존재자의 공통 성격으로 존재를 도출하거나, 아니면 그 존재자 전체의 근거이자 원인으로 최고 존재자를 찾거나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자 전체가 존재에 대해 우월하다는 것에 입각해 존재자 정체를 사유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 시대 이래로 니체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모든 사유는 형이상학적 사유다." 이것이 이 강의를 해나가는 하이데거의 근본 원칙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295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 1>의 주제가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 ~ 1976) 의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이라면, <하이데거 극장 2>의 주제는 <니체 Nietzsche>다. 영원회귀를 통한 생성으로부터 어떤 고정된 상태로의 수렴, 권력의지라는 무한동력을 통한 변화로부터 정지상태로의 회귀는 예술과 진리에 대한 의지 양 방향으로 나타나고 이들은 서로 대립한다. 초감성적이며 보편적인 세계와 감성적이며 개별적인 세계. 니체에게 진리와 예술, 진(眞)과 미(美)는 대립한다.


 무한한 생성, 무한히 반복되는 권력의지로서 세계 곧 존재자 전체는 동일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동일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 흐름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상, 동일한 상태도 단 한 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반복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다. 세계 곧 존재자 전체가 권력의지이므로, 다시 말해 무한한 생성으로서 힘들의 바다이므로 그 무한한 생성은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무한한 생성은 최종 결과만 보면 결국 동일한 것이 영원히 회귀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동일한 것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무한한 생성은 무한한 생성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는 어떤 '고정된 상태'에 귀착하게 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252


 니체에게 플라톤-기독교적 진리는 가상이고, 예술은 생 자체를 긍정하는 참된 진리다. 그렇지만, 니체에게 진리는 그 자체로 오류이기 때문에 생의 욕구를 통한 새로운 지평에서 참된 세게와 가상 세계 모두 소멸되고 남는 것은 무(無)가 된다. 니체의 인식은 여기에서 머무르게 되고, 하이데거는 이 지점에서 니체를 '최후의 형이상학자'로 비판한다.


  니체에게 '진리를 향한 의지'는 플라톤과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세계', 초감성적인 것을 향한 의지다.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에서는 그 초감성적인 세계야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그래서 그 '참된 세계'를 향한 의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의 세계에 대한 부정이 된다. 그러나 예술은 바로 이 세계, 이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세계, 늘 바뀌고 변하는 이 현실의 세계를 고향으로 삼는다. 니체에게는 바로 이 세계가 본래적이며 유일하게 참된 세계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264


 참된 세계가 제거됨과 동시에 참된 세계를 척도로 하는 가상 세계도 제거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세계는 '가상 세계'가 아니라 그냥 '세계'다. 그러므로 세계 곧 존재자 전체와 대립하는 것은 '참된 세계'가 아니라 '무'일 뿐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가상 세계와 참된 세계의 대립은 '세계'와 '무'의 대립으로 환원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극한의 지점에서 니체가 '호모이오시스 곧 일치로서 정초된 진리'의 최후의 형이상학적 변화 앞에 선다고 말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319


 어떤 이유로 하이데거는 니체를 '최초의 근대인' 페트라르카가 아닌 '최후의 중세인' 단테와 같은 위치에 놓았을까. 하이데거는 니체의 '무'에 '없음'과 함께 '없음'이라는 존재, '무존재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플라톤 이후 니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논의는 존재자를 존재로 정의하는 순간, 또다른 존재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잡힐 듯 빠져나가는 존재의 의미. 니체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비판지점이다. 프로이트의 구도로는 형이상학에서 정의하는 것은 의식으로 드러나는 부분이지, 무의식으로 감춰져 있는 영역을 넘어설 수 없고, 이것이 근대 형이상학의 한계가 된다. 마치,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에 만리장성 넘어 침입해왔다가 유유히 사라진 유목민족처럼, 라인강 건너 슈바르츠발트의 검은 숲속에서 로마 제국의 변경을 위협한 게르만 민족처럼 존재자로 드러나지 않는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고대 중국과 로마 제국의 오랜 고민이었던 것처럼, 형이상학의 오랜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하이데거는 무라는 것이 존재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무가 곧바로 '아무것도 없음' 곧 '단적인 무'를 뜻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의 무에는 '존재'도 들어있다. 다시 말해 무는 '존재'가 현성하는 방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여기에 니체의 형이상학이 '완성된' 니힐리즘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340


 그렇다면, 존재를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실존 - 자기를 앞질러 있음-을 통해 새롭게 정의할 수 없는 은폐된 존재의 비밀, 알레테이아가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한다. 실수의 범위 내에서 정의할 수 없는 식에 대해 복소수의 범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숨겨진 허수의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이처럼 알레테이아는 실존적 상황에서 비로소 온전하게 그 전모가 나타난다.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의 비은폐성 안으로 존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런 비은폐성이야말로 존재 자체다."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의 에포케(epoche)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에포케는 '억제/자제'라는 뜻과 함께 '시대/시기'라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이 말을 존재가 자신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그 '역사적 국면'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존재의 에포케는 은닉된 방식으로 형이상학의 국면 국면을 형성한다. 그 형이상학의 마지막 국면이 바로 니힐리즘이 극한에 이르는 시기다. 이 마지막 시기에 주체성의 형이상학은 완성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395


 <하이데거 극장 2>에는 이외에도 하이데거이 후반시기의 삶이 그려진다. 나치와 관련된 이야기 등 여러 흥미있는 이야기들은 각자의 몫으로 돌리기로 하고, 후반기 주저 <니체>의 큰 흐름을 대강 살피는 리뷰는 이상으로 갈무리하자...


 하이데거는 '존재 사유'를 이야기한다. '존재 사유'는 존재자만을 사유하는 형이상학에 대립한다. 존재 사유를 통해 인간은 무곤궁성의 곤궁을 '존재 자체가 밖에 머물러 있음'의 운명으로 경험할 수 잇다. 존재 사유는 존재자만을 뒤쫓는 형이상학적 사유에 대립해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존재 사유는 이 형이상학적 사유를 지팡이로 삼아 자신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존재의 진리가 환히 열리는 그 열린 터에 설 때 모든 존재자는 그 자신을 향해 해방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400



메모들에서 니체 자신이 논구한 가장 중요한 사상이 ‘권력의지‘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다. 하이데거는 이 두 가지 사상이 ‘존재자 전체의 존재‘를 부르는 두 가지 이름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권력의자가 존재자 전체의 존재 성격이라면 영원회귀는 존재자 전체의 존재 방식이라고 해석한다. 존재자 전체를 니체는 ‘세계‘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존재자 전체 곧 세계의 본질이 권력의지이며, 그 세계의 존재 방식이 영원회귀라는 것이다. - P246

이 세계 전체, 다시 말해 우주 만물을 포함하는 존재자 전체는 힘들의 바다다. 그 바다는 크기가 한정돼 있고 시간은 무한히 흐른다. 그 바다 안에서 힘들이 바닷물처럼 출렁거리고 요동치고 흘러 다닌다. 그런데 그렇게 끝없는 흐름과 요동은 그것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과거에 있었던 동일한 상태에 언젠가는 이르게 된다. 그것이 아무리 많은 시간과 세월이 걸린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 번은 동일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니체의 근본 발상이다. - P252

본질로서 진리는 하나뿐이다. 하나뿐이라는 것은 이 본질로서 진리가 모든 참된 것들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진리는 개별적인 참된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된 것들의 보편적인 본질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보편적 본질로서 진리는 모든 참된 것들에 적용되기 때문에 ‘진리는 불변하며 영원한 것‘이라는 명제가 생기게 된다. 그런데 정말로 진리의 본질은 불변하며 영원한가? 하이데거는 본질을 개별적인 것들에 두루 일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사실로부터 ‘본질은 변할 수 없다‘는 명제가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본질이 변한다고 해서 그 본질이 두루 타당하다는 사태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P276

알레테이아 곧 그리스적 의미의 진리는 ‘비은폐성‘ 곧 존재자의 드러나 있음이다. 존재자의 드러나 있음이 곧 진리다. 그러므로 인식이란 그렇게 드러난 존재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가 이미 드러나 있고,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의 본질은 알레테이아이고, 그 알레테이아를 받아들이는 것이 인식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원적인 진리 개념 곧 ‘비은폐성으로서 알레테이아‘는 곧 망각됐고, 플라톤 이래로 점차로 인식이 진리를 규정하는 척도가 돼 근대에 들어와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한 것이 되고 말았다. - P308

니체의 ‘가치 사상‘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니체에게 모든 것의 근원은 권력의지다. 그러므로 가치도 권력의지가 설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권력의지는 가치를 설정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원근법적 전망‘ 곧 ‘관점‘(Perspektive)에 있다. 권력의지는 자신을 유지하고 고양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정립한다. 다시 말해 권력의지는 자기 유지와 자기 고양이라는 두 시점에 따라 전망하고 내다보면서 가치를 정립한다... 이 차기와 관련된 것 가운데 하나가 ‘도덕‘이다. 니체에게 도덕은 초감성적인 세계를 척도로 정립하는 가치 평가의 체계, 존재자의 생존 조건과 관련된 가치 평가의 체계를 의미한다. 이 도덕에서 초감성적인 것을 정립하는 모든 형이상학이 발원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 P352

니힐리즘을 본질적으로 사유하려면 형이상학을 떠나 역사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다시 말해 니힐리즘을 존재 역사의 시야에서 사유해야 한다. 존재 자체가 역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니힐리즘이라는 형태로 탈은폐한 것이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니힐리즘의 본질은 인간의 사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사태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존재 자체의 사태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니힐리즘은 인간 본질의 사태이자 그 본질이 나타난 것으로서 인간의 사태가 된다. 이것이 니힐리즘의 존재사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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