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의 정리, 특히 무한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다루는 정리는 수학적 결과지만, 특정 물리계에서 이러한 정리를 만족하는 표본공간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경험적 주장이다. 확률에 근거하고 있는 예측에 대한 확신은 관찰과 검증을 대신할 수 없다.
내가 이 예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률론적 결과에 근거해서 실제 세계의 존재를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팽창의 예측이든, 단순히 하나의 가능성이든 이해하기 힘든 점은 아주 멀리 떨어진 다른 우주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을 잉태한 우리 우주의 전체 역사가 무한한 수의 다른 우주에서 동일하게 펼쳐져 있다는 주장이다. 뒷받침할 실험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무한에 대한 확률 논증에 근거한 이러한 주장은 팽창 이론의 결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테그마크의 주장은 기껏해야 도박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존재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다. 우울증, 동성애, 지능, 언어, 난혼, 난독증, 거식증 등과 관련된 유전의 역할에 관한 연구 소식을 접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인간의 두뇌 피질이 가진 무한에 가까운 유연성 때문에 학습은 우리 행동의 대부분을 결정한다. 우리가 학습하는 행동 중에는 말하기, 읽기, 쓰기, 계산, 논리적 생각, 사회적 상호작용, 운동, 악기 다루기 등이 있다. 심지어 서기, 걷기, 손 내밀기와 움켜잡기, 지각 능력과 같이 표면상으로는 닫힌 프로그램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에도 상당한 학습의 요소가 있다. 인간의 행동과 관련된 학습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이론가들에게 학습이란 구체적이지 않고 수동적인 과정으로, 그들이 인간 행동의 핵심이라 여기는 유전자에 대한 이해를 방해할 뿐인 골칫거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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