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의 일구통상 정책은 해안의 통제와 무역 이익의 획득이라는 두 가지 욕구를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전자가 후자를 압도해 가는 분기점을 보여 준다. 균형을 잃어버린 치우침 현상은 1784년까지 더욱 강화되었다.

대운하 시대의 동남 연해에 대한 상품 교역과 관련한 해양 정책은 사실상 국가 안보와 이를 뒷받침해 주는 물적 기반에 대한 고려 속에서 변화되는 변경 정책의 일환이었다. 피터 퍼듀(Peter Perdue)는 청조가 준가르 제국 정복을 통해 서북 변경에서 거둔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서북 변경의 정책 기조를 그대로 동남의 해양 변경 정책에 적용했다고 해석했다.

압도적인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강남의 문화적인 힘은 건륭제에게 경계심도 불러일으켰으나 결국은 여섯 번이나 강남으로 향하는 구심력으로 작용했다. 성공의 사다리인 과거에서 강남인들이 보여 주었던 힘은 대단했고, 점차 권력의 상층부는 강남 출신 인사들로 채워졌다.

대운하 시대에 최적화된 국가 운영의 패러다임이 해양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전향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인도양과 태평양을 통해 압박해 들어오는 해상 세계의 위협과 요구 속에서 중화 질서가 와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따라서 19세기 중엽의 아편전쟁과 19세기 후반의 청일전쟁에서 당한 잇단 패배는 한때의 강점이 약점의 근원으로 급속히 전환되었던 18세기 후반의 역설적인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대운하 시대와 그 이후에도 중국의 해안 지역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욕구와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대운하로 물자 조달에 문제를 못 느끼던 북경의 집권자들만이 해양으로의 진출 의욕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해적들이 투항하면서 청조의 관리들이 19세기 초엽에도 해양 방어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잘못된 안전 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운하 시대에 통제할 수 없는 해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작동함으로써 조량 해운을 억제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더 나아가 조공이라는 외피로 통제 가능한 범주에서 제한된 항구를 개방하거나 밀무역을 묵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화의 원정에서 보여 주었던 해상에 대한 힘과 능력이 있었는데도 북경 조정은 안보를 최우선시했기에 그 힘을 최대한 억제하거나 통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이 대운하 시대 중국의 바다 공포증에 대한 역사학자로서의 예의 바른 해석이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중국의 대운하 물류 시스템은 사실상 19세기 후반기에 막을 내렸다. 마침 19세기는 기선(汽船)과 철도와 같은 근대적인 운송수단이 도입되는 시기였으므로 점차 이용률이 감소했던 대운하는 마치 전근대적인 운송로의 대표적인 퇴물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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