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라는 걸출한 인물이 없었다면 네르친스크 조약의 ‘선진성’을 설명하기 곤란하다. 1689년에 대륙에서 체결된 대등한 조약은 5년 전에 바다로 향하는 네 곳의 해관을 열어 주었던 강희제의 자신감 및 유연성과 연결되어 있다.
"서양인의 목적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중국을 변화시키고, 중국이 서양의 가치를 공유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716년(강희 55년)에 강희제가 해양 방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오랜 세월 뒤에 중국은 해외의 서양 국가들로 인해 곤혹스러워질지도 모른다. 이는 짐이 예견하는 말이다."라고 했던 직감적인 예언은 놀랍도록 정확한 것이었다.
동시에 옹정제의 강력한 포교 금지령은 중국과 가톨릭 사이에서 발생한 전례(典禮) 논쟁(Chinese Rites Controversy)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적응주의(accommodation)’ 선교 방침을 취하며 북경 조정과 밀착했던 예수회와 그들의 전략에 반발했던 스페인계 탁발 수도회(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사이의 노선 갈등도 무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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