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는 북경의 물자 대동맥인 대운하에 대한 통제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고, 대운하에 결정적인 위험 요인으로 작용했던 황하에 대한 치수와 대운하에 대한 시찰을 겸한 남순을 반복적으로 거행한 것이다.

강희제가 삼번을 폐지하려고 하자 오삼계 등은 반란을 일으켰고, 여기에 대만의 정씨(鄭氏) 세력도 합세하면서 청조는 입관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 삼번의 난과 함께 극성에 달했던 정씨 해상 세력의 반청 운동은 청에 대한 복수설치(復?雪恥)와 명조 회복(‘복명(復明)’)을 바라는 조선인의 기대감을 한껏 고무시켰다.

그 와중에 천계령의 여파로 일본과 중국 사이에 조선의 중개무역이 활성화되었는데, 일본이 비단 등의 중국 제품을 수입할 때 바닷길을 이용하지 못하자 조선을 통한 중개무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건륭제가 염려했던 것은 서양인들이 내지인들과 결탁하는 문제였다. 마카오는 이전부터 예수회 선교사들의 내지 진입로이자 유럽 선박의 정착지였기에 중국인과 유럽인들 사이의 관계 형성이 용이했다.

18세기로 접어든 강희제의 치세 후반기부터 동남 연해 지역에는 지역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외래인들과 접촉하는 일이 증가했고, 이것이 지속적으로 북경의 조정을 민감하게 자극하여 결국 일구통상이라는 폐쇄적인 국면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보유한 측량술을 비롯한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가능해진 측면도 있으나, 뒤에 가려진 정치적인 동기도 간과할 수 없다. 여기서 ‘정치’란 바로 새로 확장된 변강(邊疆)에 대한 통치자의 통치 의지였고, ‘과학’이란 이를 뒷받침해 주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술적 지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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