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이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왕직-이단(李旦: ?~1625년)-정지룡(鄭芝龍: 1604~1661년)-정성공(鄭成功: 1624~1662년)으로 연결되는 해상 세력 및 이들과 연계된 일본 상인에게는 이 직항로야말로 명의 경제와 연결되는 생명줄이었다. 당시에는 중국에서도 남중국해로 진출하는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사실상 포르투갈의 경쟁력은 신식 화기에 있었다. 중국 관헌에게 ‘불랑기(佛郞機)’라고 불렸던,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온 화포가 동아시아에 불랑기포로 전래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다투는 세력에게 유럽인들이 가져온 신식 화기는 전투력 향상을 하는 데 이용 가치가 높았으므로, 포르투갈은 신식 화기를 세력을 확장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강력한 신식 무기를 앞세운 유럽의 무장 세력과의 충돌이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에서는 리치가 체감한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을 ‘양귀자(洋鬼子)’, ‘번귀(番鬼)’로 부른 것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 그 배경에는 해양으로부터 다가온 피해, 즉 포르투갈 무장 세력과의 충돌, 왜구로 인한 트라우마, 임진왜란의 여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중국과 동아시아는 결코 바다로부터 고립된 사회가 아니며, 세계가 본격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하는 극적인 상황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음을 말이다.331) 다만 그들은 화교 학자인 왕궁우(王?武, Gungwu Wang)가 잘 묘사했듯, 이른바 제국의 통제나 배후 조정 없이 해양 세계를 활보하던 ‘제국 없는 상인들(merchants without empire)’이었다.

조운 루트가 대운하로 일원화된 이후 마조는 조량 운송의 안전을 기원하는 하신(河神)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도 조운에 종사하던 운수 노동자들이 부득불 대운하를 이용하게 되었으니, 신앙의 대상이 그들과 함께 내륙으로 전파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