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의 지도는 조선의 지리적 모습이 기욤 드 뤼브룩(Guillaume de Rubrouck)의 선교 보고서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섬나라가 아니라 반도국이라는 사실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예수회가 얻은 선교 경험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성장한 종교가 이제 전 세계로 퍼지면서 제기되는 가능성과 문제점"을 선구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여파는 유럽에 국한되지 않고 예수회를 통해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 극단에 위치한 동아시아로 전달되었다.

포르투갈의 거침없는 동진에는 무역을 통해 얻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추구뿐 아니라 이슬람 세력과 대항하며 기독교를 전파하겠다는 종교적 열정이 혼합되어 있었는데, 이는 앞서 언급했던 콜럼버스의 목적과 유사했다.

리치의 기록은 고위급 관료 및 환관들의 선박이 대운하 및 이와 연결된 수로를 얼마나 특권적으로 이용하는지 잘 보여 준다. 리치는 이익이 많은 대운하의 이동에서 환관이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리고 가능한 한 환관들과 함께 이동했다.

그중 상당수의 선박은 만재(滿載)되어 있지 않았다. 상인들은 이러한 기회를 이용해서 대단히 저렴한 가격으로 이러한 선박의 빈 공간을 빌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북경에 공급되는 물품이 현지에서 생산된 것보다 훨씬 많았으며, 이를 통해 국가는 결핍 문제를 해결하고 진제(賑濟)의 필요를 상당히 감소시킬 수 있었다.

명이 임진왜란에 원병을 파견한 것은 명분상 조선의 구원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임진왜란의 여파가 명의 요동 또는 수도 북경까지 확대되는 것에 대한 우려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영락제의 북경 천도 이후 산동과 조선은 한 묶음으로 해구를 방어하는 ‘왼팔[左臂]’로 인식되었고, 그 왼팔이 잘리거나 제 기능을 못하면 바로 북경이 위협을 받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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