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유념해야 할 포인트는, 집권자들의 철저한 관리 의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운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유통이 효과적으로 통제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조운이 대운하 유통의 기본이기는 했지만, 조운 이외의 물자 유통에 대한 통제력에는 한계가 분명했고,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화되었다. 그 결과 오히려 대운하가 중국의 경제 중심지 강남과 정치 중심지 북경을 잇는 물자 유통의 대동맥 역할을 수행했다.

요약하자면, 조운이라는 국가적(national) 물류에서는 철저히 해금의 정책적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국제적(international) 물류에서는 통제된 거점과 암묵적인 밀무역을 허용했던 시대가 바로 ‘대운하 시대’였다.

여기서 영락제의 북경 천도가 단순히 수도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긴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명조의 성격을 크게 일변시켰음이 주목된다. 홍무제가 강남 경제력의 안정적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수도를 남경으로 결정했던 것과 달리, 영락제의 북경 천도는 ‘강남 정권’이라는 꼬리표를 떼어 낸 조치였다.

1415년은 국가적 물류 체계인 조운이 북경과 항주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대운하로 일원화되고 해로를 이용한 운송이 중단된 시점이 된다. 조운 방식에서 해운이 배제된 것이다.

거대한 선박의 제조 능력과 장거리 항해 능력을 폄하해서는 안 되지만, 이러한 ‘능력’과 집권자의 ‘태도’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가령 티머시 브룩이 지적했듯, 정화의 항해 목표는 콜럼버스의 그것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근본적인 동기가 달랐다. 콜럼버스의 항해 목적은 분명히 무역이었지만, 정화의 목적은 외교적으로 해양 조공국의 확대에 있었다.

운사납은제의 핵심적인 골격은 염상이 소금 유통의 행정 관청인 ‘운사’, 즉 염운사(鹽運司)에 은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소금 판매권이자 그 판매권을 명시한 문서이기도 한 염인(鹽引)을 획득하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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