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우리는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미(美)가 무엇인지 모르는 게 사실인 것 같다. 미의 무슨 본래적 형태가 있다면 불이 뜨겁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에 대한 공통적인 인식이 가능할 터인데, 우리는 우리 인간의 아름다움에도 가지각색의 형태를 상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우리 멋대로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한다.

이 방면의 대가들이 사랑의 열병에 대한 치료제로서, 갈구하는 대상의 몸을 샅샅이 맘껏 보라고 처방하는 것, 애착을 냉각시키려면 사랑하는 것을 실컷 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진실로 새겨 볼 가치가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 것으로 여기는 자산이란 공상적이고 허황된 것, 지금은 없는 미래의 것으로,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장담할 수 없는 것들이거나, 이성, 지혜, 명예처럼 사실과 달리 우리 멋대로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들이다. 그러고서 우리는 실제적이고, 사용 가능하고, 구체적인 장점은 동물들 몫으로 돌린다. 평화, 평안, 안전, 순진, 건강, 그렇다, 자연이 우리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값진 선물인 건강을 말이다.

우리는 우리 몫으로 불안정, 우유부단, 불확실, 고통, 미신, 죽은 다음까지 포함해 닥쳐올 일들에 대한 불안, 야심, 인색, 질투, 시기, 무절제하고 광포하고 길들일 수 없는 욕망, 전쟁, 거짓, 배신, 비방 그리고 호기심을 갖는다. 끊임없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 헤아릴 수 없는 격정들을 대가로 치르고서 우리가 자랑해 마지않는 이 대단한 이성, 판단하고 인식하는 이 능력을 산 것이라면 정녕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과한 값을 치른 것이다.

우리의 행복이란 불행이 없는 것에 불과하다. 바로 그 때문에 쾌락을 최상의 가치로 삼은 철학 학파조차 행복을 단지 고통 없는 상태라고만 정의했다. 불행하지 않은 것, 그것이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다.

신앙은 우리가 얻어 낸 것이 아니라 순전히 다른 이의 너그러운 선물이다. 우리가 우리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우리의 추론이나 이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 부과된 권위와 명령에 의한 것이다.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우리 판단력의 힘보다는 허약성이, 우리의 통찰력보다는 우리의 맹목성이 도움이 된다.

자신의 판단에 대한 퓌론파의 이런 입장, 즉 판단도 동의도 없이 모든 사물을 받아들이는 곧고도 단호한 태도는 그들을 아타락시아(평정)로 이끈다. 이 아타락시아는 우리가 사물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견해와 지식이 주는 인상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동요에서 벗어난, 평화롭고 고요한 생활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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