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계에서는 문화적 동질성이 한 나라의 우방과 적국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인이다. 냉전 구조에 편입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국가가 문화 정체성 없이 존재할 수는 없게 되었다.

지역은 지리와 문화가 일치하는 경우에만 국가들 사이의 협조를 낳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문화적 이질성이 크면 지리적 근접성은 동질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갈등을 증폭시킨다. 군사 동맹과 경제 협력은 회원국 사이의 협조를 요구하는데, 이 협조는 상호 신뢰에 기초하며, 신뢰는 다시 공통의 가치관과 문화로부터 가장 쉽게 얻어진다.

동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아무리 무역량을 늘리고 투자를 강화한다 해도 일본은 이들 나라와의 문화적 차이, 특히 이 지역의 경제를 주도하는 화교 경제 엘리트들의 견제로 NAFTA나 EU에 견줄 만한 경제 블록을 일본의 주도로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와의 문화적 차이는 일본과 미국, 유럽과의 경제적 관계에서 오해와 적대감을 악화시킨다. 경제 통합이 문화적 동질성에 달려 있다면 문화적으로 고립된 나라 일본의 미래는 경제적으로도 암울하다.

거의 모든 나라는 성격이 판이한 둘 이상의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집단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질적이다. 많은 나라들은 이 집단들의 차이점이나 갈등이 그 나라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분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문명 단층선의 분열 효과가 두드러지는 지역은 냉전 시대에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내건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강제로 통합된 단절국이다.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결속과 배척을 낳는 원동력은 이념이 아니라 문화가 되었다.

케말주의가 내건 기본적 원칙, 곧 ‘6개의 화살’은 인민주의, 공화주의, 민족주의, 세속주의, 국가 사회주의, 개혁주의였다. 케말은 다민족 제국의 이상을 거부하고 동질적 민족국가를 건설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을 축출하고 학살했다. 그는 술탄을 폐위하고 서구식 공화정을 정치 체제로 도입했다.

터키가 NATO의 회원국 지위를 고수하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발판으로 서구와 긴밀한 구조적 연대를 맺을 수 있고 그리스와의 긴장 완화에도 긴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NATO 가입으로 구체화된 터키와 서구의 긴밀한 관계는 냉전의 산물이었다.

터키는 왜 냉대를 받으며 번번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가? 공식적으로는 EU 관리들이 터키의 낙후된 경제발전 수준과 북구 여러 나라에 한참 못 미치는 인권 보장 수준을 거론한다. 그러나 사석에서 유럽인과 터키인은 그리스가 격렬하게 반대하고 더 중요하게는 터키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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