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혁명의 시작 - 신분제 국가에서 국민국가로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3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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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혁명이 대중의 힘 또는 폭력과 함께 추진력을 얻는 것이라 할지라도, 늘 새로운 헌정질서를 창조하는 민주적 절차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날마다 각 분야의 전문위원회들이 연구한 안을 토론하고 심의를 거쳐 헌법으로 확정하면서도, 새로 일어나는 사건에 대응하려고 예정에도 없던 시간을 할애해 토론하고 상대를 설득하면서 합의를 이끌어냈다. 프랑스 혁명의 본질적인 측면이 바로 여기에 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2/364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3권 <진정한 혁명의 시작 - 신분제 국가에서 국민국가로 Liberte>에서는 입법기관인 국회에 의해 앙시앵 레짐을 대신한 새로운 법질서의 틀을 보여준다. 기존 삼부회(三部會, Etats generaux)에서 세금을 납부할 의무만 있을 뿐,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던 제3신분이 주도하는 국회는 신분제 질서를 타파하면서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는 제도를 만들어냈다.

국회의원들이 할 일은 기본적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헌법을 제정하는 두 가지였다. 헌법을 제정해 새 체제를 만들면 그 법을 시행할 기구도 만들어야 했다. 앞으로 보겠지만 고등법원을 폐지하는 일도 새 체제에 맞는 법질서를 구현하려는 준비작업이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65/364

왕에게 한시적인 거부권을 주면서도 단원제 의회를 만들고, 미숙련 노동자의 평균 임금 3일치를 세금으로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수동시민으로 규정해 투표권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게 되는 사람들이 1789년의 국회에서 가장 발언권이 셌다. 그들은 부르주아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대주교 샹피옹드 시세, 대주교 부아즐랭, 시에예스 신부, 미라보 백작, 타르제, 카뮈, 투레 같은 법률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20/364

‘대표 없는 곳에 세금도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라는 미국독립혁명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투표권을 납세 능력과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국회의 다수 세력인 부르주아 계층의 영향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국회의 절대다수가 부르주아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제3신분의 대표성을 약화시킨 반면, 국회 내의 동질성을 강화시켰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이 되었다.

모든 회의체는 신분이 아니라 개인으로 구성하도록 했다(10월 26일). 그러나 유권자와 피선거권자를 결정할 때는 납세액을 기준으로 삼았다. 9월 29일부터 10월 29일까지 논의한 결과, 프랑스인으로서 각 선거구에 1년 이상 산 25세 이상의 남성 가운데 3일치 임금을 낼 수 있는 사람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59/364

국회에 다수 가난한 민중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아 이들의 삶이 혁명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은 부정적인 측면이었지만,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춘 이들은 자신과 동료 의원들의 이익을 위해 신분제 특권을 폐지했고,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를 개편하는 성과를 올렸다는 점은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혁명이 투기업자에게는 기회를 주었지만 대다수 가난한 국민에게는 늘 물가고를 안겨주었기 때문에 국회와 왕, 그리고 종교인이 예전처럼 사회적 불안요소인 극빈자, 특히 떠돌이들을 도와 국가에 이로운 인구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더라도 항상 힘에 부쳤다. 인구는 많은데 일거리는 언제나 부족하고,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재정문제를 하루아침에 고치지 못하는 한, 구빈문제는 혁명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난제였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현실적 불만 때문에 혁명/반혁명의 과정에 쉽게 동원되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47/364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들의 특권의 폐지는 교회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고 귀족의 작위를 공식적으로 없애는 형태로 구현되었다. 제3신분이기는 하지만 일반 대중들과 살롱(salon) 문화를 공유한 자신들을 구분한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일시적‘이고 ‘중앙집권적‘으로 운영되던 과거에서 벗어나 법에 의한 ‘영속‘과 지방분권, 탈신분제의 첫걸음이라는 면에서 혁명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마침내 7월 12일에는 시민헌법 최종안이 나왔다. 새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교회를 국가 밑에 두어 주교나 대주교의 수를 줄이는 동시에 로마 교황청과 관계를 끊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종교인의 사법적/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 오로지 종교적인 일만 하도록 했다(p220)... 계몽주의자 가운데 볼테르의 주장만큼 혁명에 확실하게 반영된 것은 없으리라. 볼테르는 틈만 나면 가톨릭교를 비판하고더 나아가 종교적 자유를 주장했는데 이제 그 길이 확실히 열렸던 것이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225/364

시민들이 주역이 되는 연맹제가 공화주의의 분위기를 한껏 드높일 때, 국회는 귀족작위를 폐지하는 문제로 한바탕 토론을 벌였다. 수많은 소책자에서 이미 귀족 작위 폐지문제를 거론했고 국민주권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6월 19일에 국회가 실천하려는 일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지난해 8월 4일부터 일주일 동안 귀족 의원들이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열 달이 지난 시점에 실제로 귀족 작위를 폐지하는 문제가 나오자 저항하는 의원이 많았고, 이튿날인 일요일(20일)에 항의서를 써서 국회에 보낸 사람들도 많았음을 볼 때, 전국연맹제를 앞두고 국회는 또 한 번 높은 산을 넘었다고 말할 수 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293/364

다른 한편으로, 혁명 세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교회의 특권 페지, 튈르리 궁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던 루이 16세와 혁명 이후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실력자로 서려 했던 라파예트 간의 대립이 서서히 격화되고 있었다. 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혁명가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준 루이 16세와 이러한 루이 16세를 혁명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 했지만, 정작 라파예트 자신은 왕에게 라이벌로 인식되는 상황.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3권 <진정한 혁명의 시작>은 혁명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수립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갈등을 함께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해결되지 않은 민중들의 어려움은 혁명을 더욱 격렬하게 몰아갔고, 지도층의 보이지 않는 알력은 여기에 기름을 부으며 전혀 예상치 못한 역사의 흐름으로 이들을 몰아간다...

라파예트는 요크타운이 함락된 뒤 야전사령관이 되어 싸우다가 1785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이미 ‘두 세계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라파예트 후작은 새로운 사상에 물들었고 네케르와 친하게 지냈다(p55)... 국민방위군의 목적이 귀족의 음모, 민중의 분노와 조급함에 맞서는 한편, 혁명의 역동성 때문에 생기는 강력한 현상을 제한하는 데 있으며, 모든 시민으로 하여금 무장하게 하는 것 자체가 시민의 세력화를 뜻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을 지휘하는 라파예트의 의지는 혁명의 과정에 큰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변수였다(p56)... 라파예트는 공화정신에 물든 왕정주의자였다. 한마디로 그는 왕과 혁명가를 화해시키는 역할을 맡고 싶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57/364

왕은 전국연맹제에서 자신이 라파예트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13일에 직접 점검에 나섰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충성심은 받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바치는 사람의 몫이다. 왕은 구시대의 상징으로 아슬아슬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역사의 주역이 여기저기서 마구 두각을 나타내는 격변기였으니 왕으로서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으리라.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342/364

이렇게 해서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상징하는 7월 14일의 전국연맹제는 무사히 끝났다. 그것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먼저 그것을 진정한 국민의 잔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중 또는 다중이 진정한 우애를 느끼고 새로운 관계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행사가 끝난 시점에 냉정한 사람은 과연 그날의 주역이 누구였는지 돌이켜보았다. 행사장에서는 분명히 왕이 정점에 있었다. 그러나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왕보다는 라파예트가 더 돋보였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347/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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