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젊음이 우리 안에서 죽을 때 어떤 충격도 느끼지 못하지만 사실 그 죽음이야말로 쇠약해진 생명이 완전히 죽어 버리는 죽음, 노년의 죽음보다 본질적으로 사실상 더 가혹한 죽음이다. 비참한 존재에서 비존재로 떨어지는 것은, 한창 꽃핀 감미로운 존재에서 고생스럽고 괴로운 존재로 떨어지는 것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지속적인 고통거리,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는 고통거리일 것이다. 죽음은 어디에서고 닥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위험한 고장에서처럼 끊임없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야 한다.

죽음이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어디서나 죽음을 기다리자. 죽음에 대해 미리 숙고하는 것은 자유를 예비하는 것이다. 죽을 줄 알게 된 사람은 예속을 모른다. 죽는 법을 아는 것, 그것이 우리를 모든 종속과 속박에서 해방시킨다. 생명을 잃는 것이 불행이 아님을 잘 알게 된 사람에게는 인생에 불행이란 없다

필멸의 존재들을 탄생시키는 작업을 홀로 영원히 수행해 가는 이 기관에만 자연이 어떤 특권을 주었다고 해도, 그것이야말로 자연이 행한 합당하고 나무랄 데 없는 작업인 셈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생식을 신성한 행위로 보았고 사랑은 불멸을 향한 욕망으로, 그리고 불멸의 다이몬 그 자체로 여긴 것이다.

요컨대 내 생각으로는 습관이 하지 않는 것도, 할 수 없는 것도 세상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들은 바대로 핀다로스가 습관을 세상의 여왕이요 여제라고 부른 것은 온당한 일이다.

습관의 권능이 가진 가장 강력한 효과는, 우리가 그것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 습관의 명령이 합당한지 따지고 판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를 낚아채서 장악한다는 점이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잔인성과 포악함, 그리고 배신의 진정한 씨앗들이고 뿌리인 것이다. 그런 것들은 거기서 싹이 튼 뒤 이윽고 거침없이 줄기를 뻗으며, 습관의 손 안에서 무성하게 자라난다. 그러니 아직 어려서 그러는 것이라거나 별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못된 습벽들을 접어 두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교육 방식이다. 우선 여기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천성인데, 천성의 목소리는 아직 가녀린 까닭에 더욱 순수하고 분명한 법이다. 두 번째로 속임수는 금화 한 닢이냐 바늘 하나이냐의 차이에 따라 그 추함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가 추해서 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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