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사이드는 더이상 ‘침묵의 범죄’가 아니다. 남반구 국가의 숲과 산, 강과 바다, 광산 등 곳곳에서 지뢰가 터지듯 점점 요란스럽게 퍼져가는 에코사이드는 오히려 노골적 범죄에 가깝다. 토착민 축출은 물론, 아마존에서 지난 십수년간 살해된 활동가들이 300명이 넘는다는 사실도 놀랍다(138면). 남반구의 환경운동은 목숨을 거는 일이며, 적의 총구 앞에 노출된 전쟁터의 병사가 되는 일이다. 생태학살 돈벌이에 나선 초국적 포식자들이 방해가 되면 무엇이든 제거 대상으로 겨냥하는 것이 에코사이드의 참혹한 정체다.

1944년 법학자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이 만든 신조어 ‘제노사이드’ 역시 초기에는 집단학살, 홀로코스트 등에 초점을 두어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했지만, 근래에는 문화·환경의 파괴 등 어떤 집단의 통합적 정체성이 해체되는 ‘사회적 죽음’으로 확장되어 쓰인다. 세계 제노사이드 연구자들은 2021년 ‘기후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선언’을 통해 "에코사이드와 제노사이드가 얽히면서 인간과 지구행성에 가하는 복합적 폭력을 직시"(118면)하라고 강조했다. ‘생태학살’과 ‘집단학살’의 명백한 인과성에 대한 주장은 기후·환경운동의 논리와 실천에 의미있는 영향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학살의 연계야말로 이 책이 담은 가장 독보적인 통찰이기도 하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산수화에는 화가 및 그림 주문자의 특정한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산수화에는 이러한 의도와 관련된 당시의 문화적 코드가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각각의 역사적 시기마다 그려진 산수화는 제작 당시에 정치·문화 권력을 쥔 인물들에 의해 산수가 어떻게 인식되고 평가되었으며 재해석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당시의 문화적 코드가 반영된 산수화는 사람들의 산수 인식을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산수화가 세계를 다시 만든 것이다.

1960년대 세계문학계에 급부상한 ‘라틴아메리카 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까르뻰띠에르는 중남미문학의 미학을 ‘경이로운 현실’과 ‘바로크’로 규정지으며 이를 자신의 작품 속에 구현해 중남미소설의 토대를 이뤘다. 그의 대표작 『잃어버린 발자취』(Los pasos perdidos, 1953)가 올해 출간된 것은 작품과 작가의 문학사적 위치를 고려할 때 뒤늦은 감이 있지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궁극적으로 도올은 수운의 사유를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서양의 초월적 신관과 실체론적 사고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사유,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이려고 한다.

수운의 사유에는 항상 초월과 내재, 개체와 전체, 신비와 이성, 인격성과 자연성, 인과성과 초인과성, 아(我)와 무아(無我), 불연과 기연, 인성과 신성, 유위와 무위, 이 모든 대립적 관계가 생성적 관계로 혼융되어 있다. 또 서양의 주관과 객관의 설정이 사라진다. "주관은 나만의 주관일 수 없다. (…) 수억만 개의 주관이 저마다의 세계, 저마다의 시공간을 구성하고 있"(34면)다. 도올은 동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재적 사고를 완벽히 전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 언어의 궤도를 일탈하여 신생로를 개척해야 하는데, 이때 가장 유용한 문헌이 바로 「용담유사」라는 것이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이른바 ‘386세대의 독식’과 그 때문에 ‘미래를 박탈당하는 청년세대’라는 구도를 생산해온 담론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세대 간의 체계적인 불평등이 있어 마치 386세대가 ‘양보’를 해야만 많은 사회적 병폐가 해소될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세대 선정주의’에 불과하다. 그 선정적인 허구성은 저자가 인용하는 조사결과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의 34세 이하 청년들 사이에서 386이나 586이라는 용어 자체를 잘 모른다고 대답한 사람이 44%인데, 그러면서도 ‘386세대가 한국사회의 기득권 세력이다’라는 문항에 80%가 동의했다고 한다(133면). 이는 확실히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강간은 여성의 몸에서 벌이는 전쟁이다. 성은 그 어떤 물리적 화학적 무기보다 값싸고 효율적인 파괴 무기라고, 피해자와 조력자와 관찰자 모두가 잘라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작품이라는 객체야말로 이러한 특징, 즉 본질을 파악하려는 우리의 노력으로는 결코 장악할 수도 닿을 수도 없는 잉여물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어야 한다. 강조컨대 평평한 존재론에 의하면 물, 공기, 새, 숲, 고양이, 인간 등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실재이지 외부의 지각에 의해 구성된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서로에게서 공평하게 물러나 있고 서로 간에 포착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자율성은 "자신이 맺은 관계들과는 별개의 실재를 갖춘 무언가"(139면)를 환기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본질을 명료하게 포착하고 진술하는 것과 예술은 거리가 멀다.

『예술과 객체』는 20세기 후반 철학의 주된 흐름을 대변해온 생성·사건 철학과 거리를 두고 포스트모던 예술 경향에서도 물러서며 존재(being)의 철학 쪽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예를 들어 그가 반형식주의 등 비평이론을 비판할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풍경은 이런 것이다. 십수년 전 한국에서 후기식민자본주의의 살풍경을 담은 영화(「괴물」)가 천이백만 관객을 동원한 다음 해 노골적 신자유주의 정권이 들어섰을 때 영화평론가들은 그 심상치 않은 어긋남을 불길하게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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