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나폴레옹이 놓친 것은 술탄이 영국과 러시아의 군사력과 해군력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술탄은 두 나라가 프랑스보다 자신들의 위협과 야심을 무력으로 뒷받침할 능력이 더 있다고 판단했다. 알렉산드르 황제는, 새로운 러시아-오스만 동맹에 대한 술탄 셀림 3세의 헌신이 3차 대불동맹전쟁의 승패에 달려 있음을 이해했다.
곧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할 러시아-오스만 관계에서 커져가는 긴장은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 동안 발생한 지정학적 재배열이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3차 대불동맹전쟁 이후 프랑스는 중유럽을 지배하게 되었고 발칸 지역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전 베네치아 영토들을 획득했다. 프랑스 정부의 대리인들이 러시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라는 지시를 받아 발칸의 다양한 지역들로 파견된 한편,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프랑스 영사관은 반러시아 공작의 중심지가 되었다.
메테르니히가 이 주제를 나폴레옹한테 꺼냈을 때 그는 배제되기는커녕 실은 오스트리아가 발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폴레옹은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시기하는 오스트리아를 이용해 그 지역에서 더 이상의 팽창을 막을 수 있길 바랐다.
1813~1815년 동안 유럽이 나폴레옹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에 오스만 중앙정부는 잠시 결정적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들은 계속되는 유럽의 갈등에 중립을 선언했고, 이탈리아로 원정을 감행하도록 러시아 전함이 해협을 통과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영국의 제의를 거절했다. 술탄 마무드는 잠깐 열린 기회의 창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킨 지방들에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고 방어적 개발주의라는, 궁극적으로는 근대화로 나아가는 프로그램을 위한 토대를 다졌다. 러시아와의 전쟁 종식으로 그는 세르비아로 군사적 자원을 전환할 수 있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패배와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은 세르비아인들에게 큰 힘을 실어줬으니 이제 러시아가 오스만튀르크에 맞서 세르비아를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술탄 마무드는 러시아의 간섭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신중히 처신했다. 그는 세르비아에 제한적인 자치를 허용하고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세르비아 군주로 인정했다. 정치적인 행보였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저도 모르게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해체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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