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계급을 세분화하고 이들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반(反)자본주의적 운동을 잠재워왔다. 가령 "철도 파업에 수험생들 ‘발 동동’"(최지인 「제대로 살고 있음」)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철도 파업이 무엇에 저항하는지는 가린 채 그것이 노동자들과 무관해 보이는 이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에 집중하게 하는 방식이다. "마르크스는 시간이 흐르면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균일한 존재 조건을 공유"하게 되며 "자본주의의 계급 구조가 점차 단순"해질 것이라 예상했고, 따라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에 맞설 응집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예측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비록 자기 노동력을 판매하는 임금소득자로서 노동계급이 폭넓게 정의되고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실제 노동자들의 경험은 대단히 파편적이기 때문에 공통된 계급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계급투쟁’을 보다 넓은 의미로 재정의하여 자본주의와 맞서기 위해 필요한 세력을 연합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하자고 주장한다. 계급운동이 특수한 노동자집단의 경제적 이익만을 대변하는 개별적인 투쟁으로 치부될 때, 자본주의에 맞서는 일에 다수가 동참하기는 어려워진다.

고봉준 역시 "지금 한국시의 주력으로 평가되는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분노’의 감정이 표면에 드러나는 장면을 찾기" 어려워진 사정이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달라진 주체화 방식, 즉 주체성의 위축에서 기인한다고 해석한다.

마크 피셔(Mark Fisher)는 지금의 자본주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든다. 이는 자본주의가 "문화의 생산뿐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규제도 조건 지으며, 나아가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까지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자본주의는 선택 가능한 체제 중 하나가 아니라 대안 없는 유일무이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향해 부정적 정서를 표출하는 작업은 어떤 감응도 창출해내기 어렵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극심한 불평등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도리어 그것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질서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향한 직설적인 비판이 오히려 자본주의는 공고하며, 혁명은 무모하고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강화하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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