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법전은 프랑스 혁명의 주요 법적 승리들을 유지했지만─법 앞에서의 평등, 시민의 권리, 영주 특권의 폐지─가정생활의 영역에서 가부장제로의 후퇴도 의미했다. 재산 소유 중간계급에게 크게 유리하도록 옹호된 사적 소유권의 불가침성은 19세기 내내 프랑스 노동계를 괴롭히게 된다.

가장 중요한 조항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1790년 이후로 몰수되거나 국유화된 교회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일체 포기하도록 요구한 조항이었다. 정교협약은 농촌 (그리고 보수적인) 지역에서 환영받았지만 군대에서는 인기가 없었는데, 여전히 혁명의 이상을 간직하고 있는 군대 내의 많은 이들은 제도 종교의 복귀에 대놓고 분노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실망감을 드러냈다

영국을 향한 대륙의 적의는 프로이센 외교관 프리드리히 폰 겐츠가 잘 요약했다. 그는 한 각서에서 "유럽 정치의 지배적 원리와 현재 모든 사상가와 정치 저술가들의 지배적인 원리는 영국의 힘에 대한 질시다"라고 썼고, 이 내용은 1800년 11월에 그렌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인용되었다. 영국을 향한 증오는 두 가지 확신에서 나온다고 겐츠는 주장했다. 하나는 영국의 부는 유럽 나머지 지역을 곤궁하게 만듦으로써 생겨난다는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이 자국의 이해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전쟁을 이용하고 있다는 확신이다.

아미앵 강화는 혁명전쟁의 공식 종결을 가져왔다. 2차 대불동맹이 이제 누더기가 되었으니 영국은 부활한 프랑스를 쓰러뜨릴 전망이 별로 없음을 시인했고, 그러므로 분하지만 프랑스가 저지대 지방과 라인란트, 이탈리아에서 정복한 땅을 계속 보유하는 것을 용인한 채 대륙의 현 상태를 대체로 수용했다.

유럽 국제 체제에 보나파르트가 가져온 유례없는 충격은 정치적으로 휘발성이 강한 프랑스 영역 내부에서 권력을 다진 다음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능력 덕분이었다. 1802년에 이르자 프랑스의 외교정책은 다음과 같은 핵심 요소들에 의존하게 되었다. 영국과의 계속되는 대결, 저지대 지방과 독일 영방국가들,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력 유지, 해외 식민 세력의 부활

생도맹그 원정의 실패는 프랑스에 즉각적인 결과를 야기했는데, 프랑스는 이제 가장 수익성 좋은 식민지와 카리브 해역의 상업 중추를 상실한 셈이었다. 더욱이 생도맹그 대참사는 대서양에서 프랑스 식민 제국 건설이라는 보나파르트의 웅대한 비전을 산산조각 냈다. 영국과의 새로운 전쟁이 거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새로 수복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보호할 수 있을지 걱정이 컸다.

반면 프랑스는 훨씬 더 만만찮은 적수였고, 캐나다에 영국 세력이 현존하는 가운데 프랑스가 미시시피 밸리를 통제한다면 미국은 두 강대국에 둘러싸이는 형국에 직면할 것이었다. 일찍이 1798년에 일부 미국 지도자들은 예방적인 루이지애나 탈취 정책을 주창했고, 심지어 미국이 미시시피강 하구를 지배하는 것을 영국은 환영할 것이라는 진술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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