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부터 1802년까지 5년간은 유럽사의 경로를 그리는 데 결정적이었다. 승승장구하던 프랑스는 처음에는 해방을 구실로 내세워 유럽에서 급속한 영토 팽창에 착수했다. 1793~1794년의 패배들이 프랑스에서 혁명적 소요의 향배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1797~1802년의 승리의 희열은 혁명 지도자들과 프랑스 공화국의 세계관을 형성했고, 그들이 프랑스 국경 너머 세상을 내다보게 했다. 이것은 "신 세계질서", 즉 통치 군주들 간의 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은 신질서를 재규정하는 과정에서 전환점이었다.
일찍이 1797년에 루이 드세 장군은 일기에 보나파르트가 "이 모든 민족들에게 프랑스 국민 French nation이라는 원대한 관념을 부여하는 위대하고 기민한 정책을 갖고 있다"라고 적었다. 그는 프랑스 최대의 적부터 시작해 지구적 규모로 그 정책을 추구하게 된다.
이집트 원정은 학문과 문화 영역에서 항구적인 유산─이집트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을 남겼지만 본질적으로는 군사적·정치적 실패였다. 원정은 레반트에서 프랑스의 전통적인 정책들을 정면으로 위배하며, 영국 식민 권력을 강타하는 대신 프랑스의 전통적 맹방(오스만 제국)이 숙적 러시아와 영국과 손을 잡게 몰아갔다. 정치적으로는 총재 정부의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대대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1798년 후반기에 2차 대불동맹이 결성되도록 촉진했다. 그것은 공화주의 이상들을 식민주의와 영토 확장과 결합하려는 기획의 실패를 의미했다.
이집트 원정이 오리엔탈리즘, 즉 비유럽의 문화와 언어들에 대한 학문의 발전에 미친 영향도 그와 마찬가지로 지대했으니, 오리엔탈리즘은 이후 유럽 식민주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집트 원정은 이슬람 사회를 유럽의 제국에 편입하려는 최초의 (그 마지막은 아니지만) 근대적 시도를 대변했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으로는 오리엔탈리즘 담론을 형성하는 데 중대한 계기, 다시 말해 오리엔탈리즘의 모든 이데올로기적 구성 요소들이 수렴되고, 서구 지배의 온갖 수단들이 오리엔탈리즘을 투사하기 위해 이용되는 계기였다. 39
19세기 대부분 동안 유럽인들은 그레이트 게임을 유심히 주시했다. 그레이트 게임이란 중앙아시아와 인도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략적 대결과 갈등을 가리키는 용어다. 아시아에서 러시아 제국의 팽창에 놀란 영국은, 자국의 이해관계가 유럽에서 러시아의 이해관계와 대립할 때마다 러시아가 영국의 가장 귀중한 식민지 속령을 침공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그러한 지정학적 책략들은 사실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고, 원조 ‘그레이트 게임’에는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가 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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