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제한된 경작지와 비옥하지 못한 토지는 2,200만의 인구를 부양해야된다. 현재의 인구 밀도는 1제곱마일당 600명이며, 이것은 일본의 인구 밀도와 흡사하고, 인도의 2배에 달한다. 농작지의 비율이나 토지의 비옥도나 또는 공업화 정도 등 여러 가지 관련 요소를 감안한다면, 한국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인구 부양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연간 인구의 자연 증가율은 2%(약 44만명)이며, 최근에는 북한에서 피난민이 쇄도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및 기타지역에서 본국으로 귀환하며 격증하였다. 40년간의 일제시대를 통하여 인구가 거의 배가하였으며, 1941년 이래로 남한 인구는 50%나 증가하였다. 경지 면적 1정보당 10명 (1에이커당 4명)의 인구를 부양해야 할 형편이다. - P341
1947년부터 1952년에 이르는 평균 생산량은 제2차 세계대전 전인 1937년부터 1941년간의 평균 생산보다도 1/4이나 낮은 수준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비료 생산 시설의 군수 생산으로의 전환은 비료 부족을 초래하였고, 이것은 특히 전쟁 후기에 혹심하였다. 해방이래로 한국은 식량 잉여 지역에서 결핍 지역으로 변화되었다. 1951년과 1952년의 낮은 생산은 기후 불량, 비료 부족 및 전쟁 피난에 기인한다고 보고되고 있으나, 시황(市況)의 혼란도 틀림없이 생산 감퇴의 원인이 되었다. 긴박한 식량 수요에 직면하여, 경지는 1951년에 260만 정보, 1952년에 250만 정보로 감소되었는데, 이것은 1949년 수준의 13% 감소, 전쟁 이전 평균 수준의 거의 25% 감소에 해당된다. - P341
일본 항복과 미·소 양군의 남북한 진주 사이에 발생된 일시적인 정치적 진공 상태는 한국 경제에 더 큰 악영향을 주었다. 남한에서는 생산은 거의 중단 상태로 들어갔으며, 생산 시설은 반달리즘과 도난으로 인하여 한층 더 악화되었다. 누적되었던 전쟁 경제의 압력은 일본 항복과 더불어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일본인의 공헌이었던 은행 제도는 전쟁 말기 수개월간 심대한 인플레이션을 조장하였고, 이로인하여 경이적 물가 폭등과 함께 가격 통제와 배급 제도의 파탄이 초래되었다. 일본인이 떠나자 가격 통제는 철폐되고 2개월 동안에 물가는 25 배로 치솟았고, 식량과 공업 생산은 급격히 저하되었다. 동시에 250만으로 추계된 피난민과 귀환민이식량 사정을 일층 위기에 빠트렸다. - P92
남북한의 경제 분업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남한에서도 한반도 전체의 산업 생산액의 적지 않은 부분이 생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업 노동자의 총 인구에 대한비율과 1인당 국민생산액도 남북한이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남한은 북한에 비하여 경공업에 중점을 두었으며, 공산물의 종류가 월등하게 많으며, 농업은 한국의 "식량고(食糧庫, rice bowl)"라고 불릴 정도로 쌀과 보리의 생산에 치중하였다. 일본점령 후반기의 자료에 의하면, 남한의 생산은 한반도 중공업 생산액의 불과 14%를 차지하는 대신, 경공업에서는 총 생산액의 3/4을 점하고 있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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