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는 실로 현대 유럽에는 엄청나게 중대한 10년이었으나, 당시 중요하게 보였던 모든 것이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의복이나 생각에서 자족적인 인습 타파의 충동은 매우 일찍 시작했다. 역으로, 1960년대 말에 정치와 공무에서 시작된 진정으로 혁명적인 변화가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기까지는 몇 년 더 걸린다.

유럽의 공립 중학교, 리세, 김나지움은 지배 엘리트 양성소였다. 한때 농촌과 도시의 가난한 집 자식들에게는 차단되었던 고등 교과과정이 이제 증가 일로에 있는 모든 사회 계층의 젊은이들에게 개방되었다. 점점 더 많은 어린이들이 중등학교에 진학하여 과정을 마쳤고, 그 결과로 그들의 세계와 부모들이 아는 세계 사이에 균열이 일어났다.

60년대 주류 음악 문화가 대체로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면, 적어도 마약과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이 또한 대체로 스타일의 문제였다. 전보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전보다 더 이른 나이에 부모를 떠나 살았다. 그리고 피임약은 과거보다 더 안전하고 편리해졌으며 합법적이었다. 영화와 문학에서 육체를 공공연히 노출하고 무절제한 성적 방종을 표현하는 일은 적어도 북서유럽에서 더욱 흔해졌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옛 세대는 성적 구속이 철저하게 무너졌다고 확신했고, 자녀들은 기꺼이 그 악몽을 키웠다. 사실 60년대의 〈성 혁명〉은 남녀노소를 떠나 압도적인 다수에게 일종의 신기루였다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인도를 받은 문화인류학자들은 언어학 분야의 초기 이론을 차용하여 여러 사회에 걸친 변이와 차이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새롭게 제시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사회적 관행이나 문화적 징표가 아니라 내적 본질, 다시 말해 인간사의 깊은 구조였다. 사람들이 〈구조주의〉라고 부른 이 같은 경향은 강한 매력을 지녔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경험을 분류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역사의 〈아날〉학파와 계통의 유사성을 지녔다.

제3세계 폭동의 폭력은 해방의 폭력이었다. 장폴 사르트르는 1961년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Les Damnes de la terre』에 쓴 그 유명한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식민주의 혁명의 폭력은 〈자기 자신을 재창조한다. ……유럽인을 쏴 죽이는 것은 일석이조이며 압제자와 압제당하는 자를 동시에 소멸시키는 것이다. 죽은 자와 자유로운 인간이 남게 되며, 생존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발밑에서 국민의 땅을 느낀다.〉

권력과 권위의 편에서 보면, 학생들은 지식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 세력보다 훨씬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신좌파의 사고에서 중요한 것은 한 집단의 사회적 기원이 아니라 권위의 제도와 구조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강의실은 그러한 일을 시작하기에 기계 공작소만큼이나 좋은 장소였다.

60년대 동유럽에서 진행된 경제 개혁 논쟁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였다. 일부 당 지도자들은 과거의 기술적 오류를 인정할 만큼 충분히 실용적이었다(또는 그 정도로 크게 걱정했다). 심지어 신(新)스탈린주의 체코 지도부조차 재앙에 가까운 제3차 5개년 계획이 절반쯤 진행된 1961년에 이르면 더는 중공업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계획이나 집단적 소유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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