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은의 세계사 - 1500~1800년, 아메리카의 은은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장문석 옮김 / 미지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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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레알은 약 3.4그램이었으므로 8레알 은화는 27~27.5그램이었는데, 이는 굴디너보다는 가볍고 초창기 탈러와는 동등한 무게였다. 순도는 천분율로 930.555퍼밀이었으므로 순은 함유량은 약 25.5그램에 달했을 것이다. 두께는 약3밀리미터였고 지름은 40밀리미터였다. 그러므로 이 은화는 대형 은화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몇몇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형편없이 주조되어 쉽게 부러지는 나쁜 주화였다. 그럼에도 이 은화는 엄청난 양으로 시장에서 유통되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96


 카를로 M. 치폴라 (Carlo Maria Cipolla,1922 ~ 2000)의 <스페인 은의 세계사 Conquistadores, pirati, mercatanti: La saga dell'argento spagnuolo>는 페소(peso)라 불리는 16~17세기 기축 통화였던 8레알 은화를 다룬다. 그렇지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 Bad money drives out good'는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을 실증이라도 하듯, 세상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8레알 은화는 양질의 화폐가 아니었다. 조악한 품질에도 불구하고 레알화가 표준이 되었던 것은 거대 은(銀)의 생산지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지속적인 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8레알 은화의 힘이 본질적으로 물량 공세에 있었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에 국제 무역의 거대한 발전은 레알 은화가 세계 각지로 대량으로 확산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 당시 국제 무역이 도달한 수준이 유지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대량의 레알로 대표되는 유동성이 시장에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만일 레알이 거부되어 유통량이 감소한다면, 국제 무역은 급격한 쇠퇴를 감수해야 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29


  아메리카 대륙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걸쳐 식민 영토를 가졌던 스페인이었기에 수입된 은은 곧바로 제국 전역으로 흩어져 공급되었는데 제국에 공급된 은은 오늘날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QE)에 견줄 정도로 빠르게 회전되었기에 세계경제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스페인 왕실은 검소한 검은 색의 의상을 선호했다지만, 의상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서는 그다지 절약하는 편은 아닌듯하다.


 왜 스페인은 식민지들이 공급해 준, 또 계속해서 공급하게 될 이 막대한 양의 은을 잃어버렸을까?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에 도착한 보물 중 약 75~80퍼센트가 사적 거래로 획득된 것이었고, 나머지 20~25퍼센트만이 왕실 수입, 즉 신민들의 광산 활동과 물품의 수출입 관세, 기타 다양한 증여에 대해 징수한 세금 수입이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알마덴 광산의 수은 판매 수입과 왕실이 도처에서 푸거 가문과 싸우며 확립한 독점체제를 통해 발생한 판매 수입이 덧붙어야 한다. 그럼에도 스페인 왕실은 줄기차게 빚을 지곤 하는 나쁜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스페인에 도착한 왕실 소속의 보물은 통상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비되고 말았다. 왕실의 채무가 무엇보다 다양한 전선에서 군대를 유지하느라 발생했으므로 왕실이 빚을 청산하기 위해 지불한 보물들은 스페인에서 빠져나와 교전 구역에서 재등장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04


 마치 오늘날의 기축통화인 달러를 무제한으로 찍어낼 수 있는 권한을 갖는 미 FRB(Federal Reserve Board, 연방준비제도)처럼 막대한 은을 보유한 스페인은 세계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는 16세기 기축통화국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몰락 또한 예정된 것이다, 책의 본문에서 치폴라는 피셔의 교환방정식(Quantity theory of Money)을 통해 이를 뒷받침한다.


 은(銀)은 국제 시장에 무제한적인 유동성을 부여한 재화이자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가지려고 한 재화였다. 바로 이 때문에 스페인은 아메리카로부터 막대한 양의 은을 건네받아 인적 자원으로나 물적 자원으로나 보잘적없던 나라(카스티야)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스페인 신학자 토마스 데 메르카도는 1569년에 올바르게도 "세비야와 대서양 연안 스페인은 예전에는 세상의 끝이었으나 이제 중심이 되었다."라고 쓸 수 있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83


 교환방정식 MV=PY 에서 M : 통화량, V : 화폐유통속도, P : 물가수준, Y: 실질소득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은의 공급과 세계 각지로의 활발한 공급은 각각 통화량 M과 화폐유통속도 V를 증가시킨다. 이에 대응해서 실질소득이 충분하게 증가하지 않는다면, 결국 물가 상승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아메리카로부터 은을 수입해 구입한 물품을 다시 아메리카로 보내야 하는 스페인으로서는 교역조건이 불리해지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에 결국 더 많은 은을 식민지로부터 가져올 수밖에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스페인의 식민지 수탈은 가속화될 수 밖에 없었고, 생산량이 한계점에 이르는 순간 스페인 제국은 급격하게 붕괴되고 만다. 스페인 제국은 아르마다(Armada)가 칼레에서 불타 멸망한 것이 아니라, 포토시(Potosi) 은 광산의 산출량이 감소하면서 몰락한 것이다.


 지금 경제 균형 상태에 있는 A국, B국, C국 세 나라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특정 시점에 A국에서 통화량이 급격히 증가하여 균형 상태가 깨졌다고 가정하자. 만일 문제의 나라가 그들의 생산 체제로는 유통 화폐량이 증가한 만큼 총생산량을 증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면, 경제 이론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는 A국은 가격 상승과 B국, C국으로의 귀금속 유출을 겪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B국, C국으로부터 A국으로 재화와 용역의 수출이 증가할 것임에 틀림없다.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막대한 은을 소유한 스페인에서 일어난 일은 이러한 이론 모델을 완전히 증명한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06


 <스페인 은의 세계사>는 이처럼 중상주의(重商主義) 제국주의 국가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처럼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긴밀하게 엮이지 않은 과거 16세기 기축통화국은 껍데기에 불과했음을 우리는 스페인 제국과 8레알 은화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을 확인 한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스페인 이후 헤게모니(Hegemony)를 잡은 네덜란드와 영국은 식민지를 보다 현명하게 수탈한다. 플랜테이션(Plantation)으로 화폐가 아닌 생산물을 식민지로부터 들여옴으로써, 화폐수량방정식의 대변을 증가시키고, 차변의 금융부분은 중앙은행의 통제 하에 두면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활용하며 제국주의 통치수단을 한 단계 발전시켜 나갔다.


 16세기와 17세기의 국제 무역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은화로건 은괴로건 멕시코와 페루에서 스페인으로 이동한 대량의 은이 다시 스페인에서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그리고 유럽 각지로부터 많은 양의 은이 다시 동양으로 향했고, 궁극적으로 인도와 중국에 기착했다. 거꾸로, 대량의 아시아 생산물이 유럽으로 향했고, 대량의 유럽 생산물은 다시 아메리카로 갔다. 주로 8레알 은화로 대표되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은은 이와 같은 무역체제가 기능하는 데 필요한 유동성을 공급했다. 이러한 체제는 적절한 유동성이 결핍되어 있던 중세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21


 이처럼 <스페인 은의 세계사>를 통해 16세기 세계 경제의 단면과 함께 중상주의 제국주의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아메리카의 자원, 아프리카의 인력 유출이 이 대륙에 미친 부정적 영향은 오늘날 세계 체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스페인 은의 세계사>는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1492년 콜롬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0~1506)의 항해가 만들어낸 문명간의 만남은 <1492: Conquest of Paradise>의 OST처럼 장중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체제의 서막이라는 점은 오늘날 세계화(gloabalization)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알려준다...


 점점 더 많은 8레알 은화가 시장에 쇄도함에 따라, 점점 더 이 화폐는 환대받고 선호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유럽인들이 은을 지불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생산품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 비유럽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8레알 은화를 소지한 사람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통하는 구매력을 소유했다. 그 반면, 레알이 없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레알 은화는 유럽 민족들에게 동양과의 무역을 현저하게 팽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11


 정복자들의 용기와 근면함, 과감함과 희생정신은 그들의 원주민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되는 잔혹함, 비인간성과 짝을 이루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적어놓은 항해일지의 명시적인 기록들에 따르면, 그가 자신들의 숙원이었던 운명적인 항해를 완수했을 때 그의 궁극적인 항해 동기는 명백히 금으로 가득 찬 땅의 발견과 정복에 있었다. 이 제노바 제독의 기록들에는 "금"이라는 표현이 강박적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도돌이표처럼 등장한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41




우리는 스페인에 유입된 모든 은 - 은괴, 식민지에서 주조된 은화, 스페인에서 주조된 은화 - 중에서 매우 적은 양만이 스페인에 남았고, 나머지 거의 모든 양이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 중상주의 신조가 우세했던 시대에 밖으로 바져나갔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 중상주의 신조가 우세했던 시대에 일어난 이렇듯 지속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은 유출은 각별한 관심 속에서 평가되었다. - P103

중국에서는 그들이 귀금속으로 직접 주조한 화폐가 없었으나, 은은 은괴나 외국에서 수입한 주화의 형태로 풍부하게 유통되었다. 중국인들은 은으로 지불할 필요가 있을 때면, 가위로 은괴나 8레알 은화 등의 주화를 편리한 무게만큼 조각들로 잘라냈다. 각 조각은 무게에 상응하는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해, 중국에서 은은 화폐라기보다는 물품으로, 즉 무게 단위로 다루어졌다 - P118

식민지 정착과 인적 이동에 대한 통제 조치는 매뉴팩처와 일부 농업 생산물의 식민지 이식에 대한 통제 조치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즉 스페인 정부가 정복 초기부터 행했던 엄격한 일체의 통제 조치들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아메리카로 오가는 일체의 물품 교역과 인적 이동을 모국 스페인의 항구 한곳에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식민지로 통하는 유일한 항구로는 1503년 이래 통상원 건물이 있던 세비야가 선택되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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