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서유럽 역사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독과 영국의 경제적 성취였다. 독일은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두 번이나 패전을 겪었다. 도시는 박살 났고, 통화는 붕괴되었으며, 남성 노동력은 사망하거나 포로수용소에 갇혔고, 운송과 공공사업의 기반 시설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영국은 분명히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유럽 국가였다. 폭격에 의한 파괴와 인적 손실을 차치하면, 도로와 철도, 조선소, 공장, 광산 등 국가 기반 시설은 전쟁을 거치면서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초에 독일 연방 공화국은 급속하게 발전하여 유럽의 발전소로 번창한 반면, 영국은 성장률에서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한참 뒤처진 낙오자가 되어 있었다. 서독 경제의 규모는 이미 1958년에 영국 경제의 규모를 능가했다. 많은 평자들에게 영국은 유럽의 환자가 되고 있었다.

1950년대에 독일이 경제 〈기적〉을 이루게 된 배경은 1930년대의 회복이었다. 나치는 통신, 군수, 운송 수단 제조, 광학, 화학, 엔지니어링, 비철금속 등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에 투자했다. 그러나 그 성과는 뜻밖에도 20년 후에 찾아왔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사회적 시장 경제의 뿌리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정책에 있었다.

강요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 그리고 개인적 욕구의 과감한 무시는 공산당의 도시 계획이 초래한 재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서유럽의 도시 설립자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특히 지중해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많이 이주한 탓에 도시의 재원에 대한 압박이 상당히 심했다.

엄청난 규모의 도시 파괴, 그리고 과거를 정리하고 한 세대 만에 폐허에서 초현대적 상태로 도약하려는 범유럽적 충동은 응분의 대가를 받게 된다(고맙게도 1970년대에는 경기 후퇴의 도움을 받았다. 경기 침체로 공공 예산과 가계는 동시에 축소되었으며 광적인 재개발은 중단되었다)

전후 유럽 자본주의의 성공담에는 어디서나 공공 부문의 역할 증대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국가 개입의 성격은 상당히 다양했다. 대륙 유럽의 국가들은 대체로 산업의 직접 소유를 삼가고 간접 통제를 선택했다(대중교통과 통신은 예외였다). 종종 이론상 자율적인 기관들을 매개로 했는데, 문어발처럼 여러 곳에 관여했던 이탈리아의 산업재건공사가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사례였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 민주당들은 해마다 전체 투표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으며, 그 결과로 수십 년간 중단 없이 정권을 담당했다. 때때로 고분고분한 군소 정당들이 참여하는 연립 정부를 이끌기도 했으나 대체로 단독으로 정부를 통제했다.

국가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20세기 초의 신뢰는 여러 형태를 띠었다. 스칸디나비아 사회 민주당은 영국 복지 국가의 페이비언 개혁주의처럼 온갖 종류의 사회 공학에 폭넓게 매료되어 탄생했다. 그래서 소득과 지출, 고용, 정보를 조정하는 데 국가를 이용했으나, 조금만 정도가 지나치면 개개인의 삶에 어설프게 관여하려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급부금과 서비스를 정액으로 제공하는 영국식 제도는 유복한 전문직 중간 계급에 지나치게 유리하다는 점에서 기묘할 정도로 퇴행적이었다. 하지만 비록 표면적이었을지라도 이 또한 어쨌든 평등주의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군말 없이 이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960년대 노동당 정부의 가장 중요한 혁신은(종합 중등 교육 제도의 도입과 선택 중등학교 입학시험 폐지는 노동당의 장기적인 공약이었으나 1945년 이후 애틀리가 무시해 버렸다) 그 내재적인 장점이 아니라 〈반(反)엘리트주의〉적이어서 〈공정〉하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졌다.

국가가 시민의 고용과 복지에 점점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동안, 시민의 도덕과 의견에 대한 국가의 권위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당시에 이러한 현상은 역설이 아니었다. 유럽의 복지 국가를 옹호했던 자유당과 사회 민주당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정부가 주민의 경제적 안녕이나 의료 복지에 면밀히 주의를 기울이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민의 복지를 보장하면서, 종교와 섹스 또는 예술적 취향이나 판단 같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시민들의 견해와 관행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이 지당하다고 보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1962년 10월 11일에 소집되었다. 공의회는 이후 며칠간 작업을 진행하면서 가톨릭 기독교의 전례와 언어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말 그대로다. 소수의 전통주의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했지만 라틴어는 이제 교회의 일상적 의식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현대적 삶의 딜레마에 대한 교회의 반응도 바꾸었는데 이 점이 더 중요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을 보면 교회는 이제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유 민주주의와 혼합 경제, 현대 과학, 합리적인 사고, 나아가 세속 정치의 반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했다. 다른 기독교 종파와 화해하려는 첫 번째 매우 시험적인 조치들이 취해졌으며, 유대인이 예수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오래 지속된 설명을 고침으로써 교회에 반유대주의를 억제할 책임이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많이 인정한 것은 아니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이제 더는 권위주의 정권의 지지 기반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톨릭교회는 권위주의 정권의 반대자들 편에 설 가능성이 높았다.

1960년대는 유럽 국가들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19세기 서유럽에서 시민과 국가의 관계는 군사적 필요와 정치적 요구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새로 선거권을 획득한 시민들의 현대적 권리는 왕국을 보호할 오래된 의무의 이행과 상계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이래로 그 관계의 특징은 국민이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이루어지는 사회 복지 혜택과 경제 전략의 조밀한 조직이었다.

세월이 더 흐르면, 모든 것을 망라하려는 서유럽 복지 국가의 야심은 매력의 일부를 상실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약속을 절반이라도 지키려 했지만 실업과 인플레이션, 노령화한 인구, 경기 침체 탓에 극복할 수 없는 제약을 안았다. 국내 경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은 국제 자본 시장과 현대 전자통신의 변화로 불구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개입주의적 국가의 정통성 자체가 허물어졌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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