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사실이 남아 있는데, 구석기 동굴벽화의 뛰어난 수준과 그 창작자에 대한 암시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형태나 기술에서 고도의 숙련성을 보여주는, 다시 말해 주제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아는 진정한 예술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게 아닐까. 뛰어난 그림이나 암각으로 장식된 동굴이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많다.

마지막으로, 동굴벽화의 걸작들 대부분은 다시 칠하거나 손보지 않고 한 번에 제작된 게 많은데 이는 작가들이 선천적인 재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필수적인 교육과 수련을 통해 숙련된 기술을 선보일 수는 있지만, 교육을 한다고 천재가 나오는 건 아니다.

일상 세계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내재된 가공할 만한 힘을 중재하는 자이니만큼, 우리는 샤머니즘 사회에서 샤먼을 선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다. 자연 세계와 초자연적 세계의 평형을 잡아 주고, 집단의 생존과 존속을 결정적으로 보장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결론은, 이만여 년 동안 충분히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기본 개념을 갖춘 종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 전역에 이 종교를 토대로 한 동일한 행동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 토대를 탐색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그 토대를 통해 사고의 틀, 세계에 대한 특정한 개념 등을 갖추어 갔을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샤머니즘의 토대가 되는 기본 개념은 세계(또는 세계들)의 투과성과 유동성이다. 샤먼적 요소들(환영이나 환각)이 대부분 모든 종교에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런 개념들이 신앙 및 의례에서 상당히 오래 지속되는 틀을 가질 정도로 충분히 강한 도구로 사용될 때만 샤머니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트랜스라고 부르는 것도 오늘날에는 의식이 바뀐 상태를 특정할 때 사용되지만, 실제 샤머니즘 문화에서는 특화된 필수적인 수단이다.

빙하기시대의 벽화 예술과 이를 만들어낸 믿음은 그저 단순히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정말 인간적인 사회와 만나고 있다. 다시 말해 나름대로 세계를 이해해 보려 애쓰고, 예술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상당히 복잡한 사회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독창성은 지하 환경을 개발하고 활용했다는 데 있다. 야외가 아닌 동굴 안쪽에 그들의 작품과 흔적을 남겨 그 오랜 세월 보존될 수 있었다.

요컨대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어도,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 개연적인 것에 기대어, 우리는 매우 신중하게, 너무나 멀리 떨어진 이 사냥꾼들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약간 흔들리면서도 생생한 그들의 실루엣을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했다.

인간 정신성의 위대함이 만일 이 죽은 자들이 가 있는 세계를 어떻게든 찾고 그 세계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몸부림에서 일어났다면, 연속성에 대한 강렬한 희구와 그 실현이라는 희열(실제 체험이든 환각이든)만이 예술과 종교를 설명하는 근본적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예술이 환치 가능한 등가어인 이유는 흔히 이런 맥락에서 설명된다. 선사인과 현대인은 죽음 앞의 이 무력함에서만큼은 진정한 동시대인이다.

선사인들이 동굴 내벽 너머 다른 세계와 닿기 위한 간절함으로 암각화를 새겼듯 현대의 예술가는 선과 색채를 통해, 즉 ‘언어’를 통해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세계와 닿으려고 몸부림친다. 예술이 선과 색채, 언어 자체에 있지만은 않음은 이쯤 되면 명확해진다. 우리는 회화든 문학이든 한 작품에 씌어진 ‘언어’를 읽으면서 그 안으로 들어간다. 언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어 너머로 흘러드는 것이다. 독서의 순간이다. 무아지경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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