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이란 최우선의 권력 또는 권위이다. 현대 영국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 않다. 유럽연합이나 다른 단일기관이 영국 국민의 주권을 박탁한 것도 아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군림하는 것은 기득권층이다. 바로 이 기득권층이 영국 민주주의를 축소하고 박탈했으며, 나라가 아주 소수의 허세를 부리는 엘리트를 위해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그 부분이 바뀌기 전에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태로울 것이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338/382


 오언 존스(Owen Jones, 1984 ~ )의 <기득권층 The Establishment>은 영국사회 상층부를 구성하는 네트워크, 현대 귀족 집단을 설명한다. 정치인, 언론, 기업, 금융자본, 회계법인, 조세당국 등 서로 다른 분야에 전문가 또는 권력집단은 카르텔을 형성한다. 상대적으로 극소수에 해당하는 이들은 긴밀하게 상호연대하여 각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한편, 자신들이 지배하는 다수들을 교묘하게 분리시켜 분할통치한다. 과거 19세기 제국시대 열강들처럼.


 내가 이해하는 '기득권층'의 의미는 이렇다. 오늘날 기득권층은 언제나 그렇듯이 권력있는 자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성인 인구의 거의 전체가 투표권을 가지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지킬 필요가 있다. 기득권층은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도록 '관리'하려는 권력 집단의 시도를 대표한다. 이런 점에서, 기득권층은 권력자 집단을 더 광범위한 인구로부터 보호하려는 방화벽으로 볼 수도 있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13/382


 기득권을 보호하는 또다른 장치는 대중의 분노가 사회의 상부가 아닌 최하층에게로 굴절되는 현상이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저소득 노동자에게 임금을 적게 지불하는 고용주를 향해 분개하기보다, 호사스런 생활을 한다는 실업수당 청구인들쪽을 시샘하게 만든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343/382


 그들은 피지배계층을 중간계급(대중)과 최하층으로 분리한다. 이른바 차브(chav)라 불리우는 이들 집단은 대중의 분노와 모멸의 대상이다. 과거 유대인과 집시가 차지했던 자리를 이제는 이들이 대신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다른 저작 <차브 Chavs>에서 다뤄지며, 이들이 하나의 세트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세트에서 다뤄지지 않는 중간계급(중산층)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기득권과 절망하는 차브들의 이야기는 21세기 영국사회의 한 단면이다.


 대처리즘이 영국의 새로운 기득권층을 형성해냈다면, 레이건 행정부도 두 임기를 치르며 미국에 비슷한 현상을 일으켰다. 레이거니즘은 많은 부분 두 이념의 혼합이었다.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그것이다(p314)... 영국에서 토니 블레어, 그리고 미국에서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부상은 영국 기득권 지식인과 미국 엘리트의 결속을 강화시킨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316/382


 '차브'란 급증하는 무식쟁이 '하층계급'을 뜻한다. 그들이 서점에서 그 책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차브는 슈퍼마켓 계산대의 계산원이나 패스트푸드점의 점원 또는 청소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 모두 '차브'란 특별히 노동계급을 가리키는 모욕적인 언사임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_ 오언 존스, <차브> , p7/446


 온건파에서 급진파까지 여러 면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영국 기득권층의 통치이념은 일관적이다. 국가는 나쁘고, 기업인이 재능을 발휘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자유시장이 성장과 진보를 책임진다. 진정 부를 창조해내는 이는 바로 기업인들이다. 모든 엘리트 정치인들도 이런 정서를 공유한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199/382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간층으로의 지지를 받는 것은 체제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선결과제다. 저자는 이를 위한 희생양으로서 '차브'가 지목되었다고 본다. 신자유주의와 신자본주의가 결합한 영미식 자본주의 제도 아래에서 금융자본에 의한 민영화가 확산되고, 시장주의가 퍼져가면서 사회는 암울하게 돌아가며 대중의 불만이 쌓이게 된다. 이에 대한 돌파구가 바로 하층민인 차브에 대한 사회적 공격이다.


 모든 것은 중간계급의 기준에서 판단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가 바로 중간계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포부도 없는' 게으름뱅이 건달들, 인종주의자들과 술주정뱅이, 강도 등으로 이루어진 쓸모없는 찌꺼기들처럼 묘사된다.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되고, 최근 몇년간 빈곤층은 실제로 더 가난해지는 상황에서 최하위계층에 대한 적대감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은 비극적인 동시에 불합리한 일이다. 차브 혐오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다. _ 오언 존스, <차브> , p201/446


 차브는 이러한 공격에 대해 반격할 수 없다. 노동의 파편화와 비정규직 확대, 정규직 감소라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은 세력을 잃어갔고, 노동조합에 근거한 노동당의 위치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당마저, 중간계급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들은 고립되어 갔고, 점차 극우화되는 양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극우화된 차브를 더 혐오하게 되면서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대립은 심해졌다.


 종합해보면 신노동당의 복지정책은 무능하고 열망이 없으며 얻어먹기만 하고 비정상적인 데다 무질서하다는 일련의 차브 이미지를 노동계급에 부여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보수당이 아닌 노동당에서 나옴으로써 노동계급 사회와 개인을 향한 중간계급이 가진 수많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런 공격은 직접적인 공격보다 더욱 교묘하다. 신노동당의 기반이 된 많은 철학들은 중간계급 승리주의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_ 오언 존스, <차브> , p136/446


 노동계급을 악마화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잔인하도록 합리적인 방법이다. 그들을 악마화하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그리고 극도로 불평등하게 이뤄지는 부와 권력의 분배를 사람들이 지닌 가치와 능력을 공정하게 반영한 결과라고 합리화하는 것. 그러나 이런 악마화는 훨씬 더 치명적인 의제를 갖는다. 오직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교의는 특정한 노동계급 공동체들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문제 전반에 적용된다. _ 오언 존스, <차브> , p274/446


 부유층 엘리트들의 구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복잡해지면서, 노동조합이 노동자에게 더 큰 몫의 부를 돌리려고 연대해서 힘을 사용하는 일이 전례없이 어려워진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저항 부재는 일터에서나 사회 전체에서나, 기업엘리트에게 전무후무한 권력이 집중될 수 있게 했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276/382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노동이 문제다(p231)... 노동조합의 약화는, 호황기에도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지 않고 정체됐던 까닭을 설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엄청난 금액의 돈이 주로 사장과 기업주들을 배불리는 데 돌아갔는데, 그 까닭은 유럽에서 가장 장시간 노동을 하는 수백만명이 자신들의 온전한 몫을 얻도록 도와줄 조직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_ 오언 존스, <차브> , p233/446


 그 사이 기득권은 자신들의 요구를 차례로 관철할 수 있었다. 연구기관에 의해 자신들의 요구를 정당화하고, 언론을 통해 여론몰이를 하며, 민영화를 통해 기업들에게 더 많은 부를 안기며, 기업활동 전반(IPO부터 세금납부까지) 회계법인과 조세당국과의 긴밀한 유착은 부가 그들의 이너서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면서 그들의 권력을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점점 심각해지는 부와 권력의 집중은 여러 이유로 일어났다. 기득권층의 이념은 너무나 지배적이고, 거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도전받지 않고, 좀 기벽이 있는 사람이나 정치적으로 살아있는 화석류급인 사람만이 도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기득권층의 이념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는데, 그 논리를 따르다보면 부자감세, 민영화, 그리고 노동자 권리 박탈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린다. 싱크탱크와 언론기업은 끊임없이 이런 목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기업 엘리트의 이익이 국가 전체의 이익과 동의어인 것처럼 묘사한다. 대기업은 정당과 싱크탱크에 돈을 댈 뿐 아니라 국가기관 자체와 부분적으로 융합되어 있다. 노조의 철저한 약화로 조직화된 운동에서 나오는 대항력이 부재하는 마당에 부와 권력이 끊임없이 최상층으로 이동하는 것을 견재할 방법은 이제 거의 없다. 기득권층 이념과 대기업의 정치적 지배, 그리고 선동자들에게 아무도 대항하지 않는다면 이 과정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아마 더 가속화될 것이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279/382


 저자는 <기득권층>과 <차브>에서 서술된 구조가 개혁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보았다. 기득권의 피라미드는 튼튼하고, 이를 무너뜨릴 힘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에 대한 해결책은 세트에서 다뤄지지 않는 다른 계급에서 찾아야 한다. 중간계급이다.


 극우의 부상은 더욱 큰 위기를 예고하는 하나의 징후다. 그 위기란 노동계급의 대표성 위기다. 정치의 여역에서 축출되고, 정체성이 파괴되며, 사회 안에서 누려온 권력이 축소되고, 그들의 관심사가 외면받고 있음을 생각할 때, 국민당 같은 정당에 투표한 노동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놀라울 수 있다(p372)... 우익 포퓰리즘의 부상과 대중의 정치적 소외, 비관주의와 냉담함은 영국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위기에 처한 것은 노동계급의 미래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미래가 위태롭다. _ 오언 존스, <차브> , p373/446


 이 세트에서 중간계급은 다뤄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계급은 기득권에게 이용당한다는 측면에서는 피해계급인 반면, 하층계급인 차브를 악마화한다는 점에서는 가해계급이다. 이러한 이중의 성격을 갖는 중간계급은 계급구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 비중을 구조를 바꿀 힘으로 활용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현 제도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는 자신과 무관한, 완전히 추상적이며 삶과 동떨어진 무언가처럼 느껴진다. 많은 국민들이 투표는 아무 소용없는 짓이라고 여긴다. 여러 도시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를 들어보니, 그것은 놀랄만큼 서로 닮아 있었다. '투표해도 아무것도 안 바뀐다' '정치인들은 다 자기네 생각밖에 안 한다' '정치인들은 제 잇속 차리기에만 바쁘다' '정치인은 다 똑같지' '항상 공약을 어기지 않느냐' 같은 것이 그 이유들이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346/382


 기득권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 속에서 길들여진 실망감을 느꼈기에, 그들은 차브들에게 빼앗아온 프리미어 리그(Premier Leagues)에 열광하는 동안, 의료 민영화를 통해 자신들의 서비스가 기득권의 이윤창출의 수단이 되었음을 깨닫지 못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매우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러한 구조에 대한 개선점을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제시한다. 그리고, 그 출발은 적극적인 자기 의사 표명에 있다. 


 오언 존스의 <기득권층>과 <차브>는 영국사회를 분석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영국문제를 보여준다. 이는 우리 사회의 문제가 세계화에서 온 것임을 반증하는 한편, 쉽지 않은 문제임을 함께 알려주는 것이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지만, 가야할 길이기에 우리는 관심을 놓칠 수 없음도 함께 생각한다. 2022년 6월 1일 지방선거. 생각을 실천을 옮겨할 때이기에 두 권의 책을 페이퍼로 서둘러 정리한다...


 민주 권력을 사익집단에 굴복시키고, 실질적 의제가 아니라 뉘앙스만 서로 다른 정치엘리트를 양성해서, 기득권층은 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을만큼 훼손했다. 기득권층은 많은 사람들이 체념하고, 희망을 완전히 잃고, 저항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물론 기득권 지배의 영속화를 돕는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347/382


 민주혁명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이들의 사례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혁명의 지지자들은 또한, 선동자들의 사례에서 용기를 얻어야 할 것이다. 전후 시대에 선동자들은 패배한, 별 볼일 없는 주변부였으며 역사의 행진에 짓밟혀 먼지가 된, 실패한 사상을 옹호하는 자들이었다. 그 구성원들은 심히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고, 숫자도 적었다. 선동자들을 버티게 했던 것은 자기 사상에 대한 신념이었다(p348)... 민주혁명을 지지하는 이들이 성공하려면 분열된 이들을 한데 모으고, 유능한 우리의 선동자를 만들어내야 하며, 그 한 조직은 적대적인 환경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솜씨 좋은 싱크탱크의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 p349/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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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글 2022-05-27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안녕하세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국 사회에 대한 분석글이지만, 요즘 한국 사회의 모습과도 겹쳐보이네요. 한국은 특히 기득권을 얻거나 중간 계급까지 올라 선 사람들이 경쟁을 통해 정당하게 얻었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어서 더 그 카르텔이 더 견고하고, 그 카르텔 밖에 있는 사람들 자신조차 경쟁에서 졌으니 내가 무능력하고 부족하다는 생각에 저항의식 자체가 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20~30대는 특히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경쟁을 겪으며 성장한 세대라, 공정에 민감한 한편 한번 사회에서 낙오되면 이렇게 자신을 경쟁에 내모는 사회구조에 저항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탓하고 체념하여 재기하기가 힘든 것 같아요. 관심있는 주제라 흥미롭게 읽었고 답답한 마음에 제 생각도 남겨봅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7 22:10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베이글님. 저 역시 베이글님과 마찬가지로 <기득권층> <차브>를 읽으며 우리 사회의 현재 문제를 옮겨놓은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전에는 자신이 기득권층이라는 것을 부인하려는 분위기가 강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기득권임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계급투표를 당연하게 말하는 변화를 보면서, 정치성향에 따른 분화와 함께 경제력에 의한 세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분화가 교육과 자본세습을 통해 영구화된다는 것에 있겠지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별개의 공간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미래가 아닌, 사회안전망 확충을 통해 자신의 능력에 따른 계층이동이 자유로운 미래가 되어야 할텐데,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는 듯하여 안타깝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류에게 불평등의 문제가 신자유주의 시대에 갑자기 생겨난 현상이 아닌, 신석기 혁명 이후의 거대한 흐름이라 본다면, 당장 해결되기를 바라고 쉽게 포기하기보다, 평등을 위한 거대한 물길의 일부가 되어 꾸준히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베이글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