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급의 악마화는 국민당의 성공 스토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노동계급의 문화는 지배엘리트들에 의해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되었지만, (올바르게도) 소수민족 집단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살아왔다. 나아가 자유주의적인 다문화주의는 불평등을 계급이 아닌 순수하게 인종의 프리즘을 통해 이해해왔다. 이런 요소들이 합쳐지면서 결국 백인 노동자들은 다문화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민족적 자부심과 유사한 관념을 발전시키고, 인종에 기초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도록 고무받았다. 국민당은 백인 노동계급 구성원들을 이처럼 재앙에 직면한 사람들로 재정의함으로써 그들을 또 하나의 주변화된 인종적 소수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주류에 속하는 어떤 정치적 목소리도 숙련 일자리의 감소를 세계화와 제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의 부재라는 맥락 속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매일 우익 언론인과 정치인들의 왜곡된 선동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 고든 브라운이 ‘영국의 일자리는 영국 노동자들에게’라는 공약으로 희대의 오판을 저질렀을 때, 그는 단지 (영국 기업의) 일자리들이 지금껏 다른 곳으로 유출돼왔다는 견해만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계급정치는 부자들과 그들을 정치적으로 옹호하는 자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는데, 이는 노동계급의 악마화에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부자의 계급정치가 가진 첫번째 신조는 단순 명확하다.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계급을 부정하는 것은 정말 편리하다.

노동계급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혹은 사라지고 있다고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은 분명 정치적으로는 유용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차브라는 캐리커처가 대다수 노동계급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도록 어떻게 이용됐는지를 살펴봤다. 엘리트 계급의 대변자들이 충분히 간파하듯, 지금까지 좌파가 줄곧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계급 덕분이었다.

주장의 결론은 명확하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문제라는 것이다. 잔인하게도 이 밑바닥 인생들에겐 자기 자신들 말고는 탓할 사람이 없다.

좌파는 사회에서 가장 주변화된 집단을 꾸준히 옹호한다. 그것은 좌파의 의무기도 하다. 그러나 좌파는 너무도 자주 노동계급을 ‘대체할’ 누군가를 찾아왔다.

금융가들의 탐욕이 빚어낸 경제위기를 겪으며, 부자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가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사회인지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새로운 계급정치는 헤게모니를 쥐고 있고 어떤 도전도 받지 않는 부자들의 계급정치가 이 사회에 만들어낸 불균형을 시정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개인들의 이익이 아닌, 민중들의 필요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또 한번 구현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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