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총선이 한창 준비중일 때 노동조합이 확실한 의석에 낙하산 후보를 내려보내고 있다고 많은 언론들이 흥분해서 보도했다. 가령 『타임스』는 "노동조합이 노동당을 더 왼쪽으로 몰아놓기 위해 후보들을 꽂아넣는다"고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결국 새로 선출된 의원 중 단지 3%만이 노조 출신이었다.
평생을 공영주택에 살았고 공영주택보호연대의 전회장이었던 앨런 월터는 이런 악마화에도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지적하며 두 가지 목적을 읽어냈다. "그들은 집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지만 더이상 어쩌지 못할 사람들만 공영주택에 남겨두려고 했어요. 그들의 목적 중 하나는, 공영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사회적 부적응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든 능력이 있거나 의지가 있는 사람은 그곳을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이에요."
종합해보면 신노동당의 복지정책은 무능하고 열망이 없으며 얻어먹기만 하고 비정상적인 데다 무질서하다는 일련의 차브 이미지를 노동계급에 부여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보수당이 아닌 노동당에서 나옴으로써 노동계급 사회와 개인을 향한 중간계급이 가진 수많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런 공격은 직접적인 공격보다 더욱 교묘하다. 신노동당의 기반이 된 많은 철학들은 중간계급 승리주의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 철학들은 넝마를 걸친 채 남아 있는 노동계급은 역사의 잘못된 편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같은 ‘중산층 영국’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사회적 유동성은 노동계급의 조건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개인 중 소수를 뽑아서 중간계급에 낙하시키는 데 기여한다. 그것이 강조한 것은 노동계급이란 빨리 벗어나야 할 짐이라는 인식이다. 그것은 계급을 폐지하거나 파괴하자는 말이 아니라 그저 개인들이 계급 사이를 이동하기 쉽게 만들자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 다수의 상황에는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사회적 유동성은 가난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에서 도망치는 길을 제공하는 것이다.
삶에서 당신의 운명을 증진시키는 공식적인 길이 중간계급이 되는 것이라면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무엇이 되는가? 확실히 모든 사람이 중간계급 전문직업인이나 사업가가 되지는 못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사무실이나 가게에서 사회가 돌아가는 데 필요한 일을 하는 노동계급으로 일해야 한다. 그러니 그들이 처한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직업에서 벗어나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것은 결국 그들을 부적합한 사람들로 내몬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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