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과 세계사 1 - 대륙별 구석기 문화 케임브리지 세계사 3
마리아 팔라 외 지음, 그레이엄 바커 외 엮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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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질학적으로 보자면 대략 1만 1500년 전을 분기점으로 기후가 바뀌었다. 그 이전이 플라이스토세(홍적세 洪積世, 빙하기라 부르며 기온과 강우량의 변화 폭이 매우 컸던 시대)이며, 그 이후가 오늘날을 포함하는 홀로세(현세 現世)다. 그 이전까지 인류는 수렵, 어로, 채집(이른바 "포레이징") 등의 방식을 적절히 섞어가며 식량을 확보했다. 그러나 수천 년이 지난 뒤 인류의 대부분은 거의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게 되었다. 농업의 시작은 분명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농업은 자연 경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을 뿐 아니라 도시화와 복합적 사회 구조 및 불평등을 초래했고, 이후의 역사를 완전히 압도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31


 그레이엄 바커(Graeme Barker, 1946 ~ )와 캔디스 가우처(Candice Goucher, 1953~ )의 <케임브리지 세계사 3 Cambridge World History Vol. 2 Ch.1-7 : 농업과 세계사 1 : 대륙별 >의 주제는 농경문화(農耕文化 Agrarian culture)다. 빙하기 이후 새롭게 등장한 농업(農業)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전 시대까지 자연의 일부였던 인간은 이제 자연을 자신을 둘러싼 배후지로 인식하고, 이러한 인식은 도시를 중심으로 한 고대 농업도시로 이어지는 내용이 본문에 소개된다.


 농업의 발전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여정이었다. 그 과정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결과가 상충되는 경우가 많았다. 홀로세에 와서는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계가 플라이스토세의 균형에서 벗어나, 지구상 다른 모든 존재의 희생을 딛고 오직 인간의 생존과 인구 확정에 유리한 방식으로 바뀌었다. 농업이 등장한 이후 발전을 거듭한 결과, 세계의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42


 그렇다면, 이와 같은 극적인 변화가 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농업과 세계사 1>에서는 빙하기의 어려움을 겪은 여러 집단에서 식량의 보존과 저장을 위한 전략이 고민되었음을 알려준다. 다만, 이러한 전략이 구체적으로 실행되기 위해서는 온화한 기후가 전제되어야 했고, 이러한 기후가 만들어낸 퇴적층에서 인류는 생존전략을 실행할 수 있었다.


 의도적 식량 생산을 향한 초보적 시도는 최후빙하기가 끝난 뒤에 바로 시작되었다. 새로운 식량 확보 전략은 어느 한 지역에서만 실행된 것이 아니었다. 기원전 1만 1000년에서 기원전 5000년 사이 세계의 여러 곳에서 독립적으로 새로운 전략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125


 수렵채집인이 아주 가까운 주변에 널린 식량 자원을 전면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 핵심적 계기는 바로 간석기 이용 기술이었다. 그들이 사냥한 동물들은 다양했지만,대형 동물이라 하면 주로 가젤이었다(p246)... 최근 식물고고학에서 그들이 섭취한 주요 식물들을 연구한 성과가 있는데,  그 결과에 따르면 이행의 핵심적 시기는 더 나중이었다. 즉 홀로세 초기 온화한 기후가 회복되고 나서야 재배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247


 변화의 동력을 단순히 생태 환경의 변화만으로 한정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변화의 측면을 고려할 때, 의사 결정 전략, 위험 관리, 자원의 공동 이용, 기술 혁신 등이 모두 식량 생산으로 가는 길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반적으로는 농업 이행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요인을 기후 변화로 인식하고 있었다. 농업인이 새로운 생태 환경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비결은 충적선상지와 범람원을 성공적으로 관리했기 때문이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65


 이러한 농경문화가 식량의 안전성을 확보시켜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농경문화가 인류에게 축복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또다른 별개의 문제임을 <농경과 세계사 1>은 보여준다. 오랜 진화의 결과인 신체에게 갑작스러운 음식의 변화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 결과 개인의 건강은 악화되었으며, 공동체 면에서도 대단위 노동력의 사용과 이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발생하면서, 인류는 헤시오도스(Hesiodos, BCE 740 ? ~ BCE 670 ? )가 노래했던 황금(黃金)시대에서 은(銀)의 시대로 강제로 넘어가야 했다. <성경>에서 카인이 농경문화를 아벨이 목축문화를 상징하고 그들의 부모가 낙원에서 쫓겨나는 것은 또다른 형태의 강제 이주일지도 모르겠다.


  농업 이행기에도 식생활과 생활 양식 전반에 걸쳐 수렵채집인 선조들과 다른 변화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고생물학 연구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이 나빠지는 경향이 확인되었다. 특히 경제적 이행기에, 그리고 사회가 더욱 복잡해질수록 그러한 악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예컨대 농업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질병이 나타났고, 출산율과 인구 밀도가 높아지고 인구수가 증가했음이 확인되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190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넘어가는 경제적 이행 과정에서 농업이 도입된 이후 일관되게 나타난 경향은 삶의 질 저하였다(p206)... 곡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사육하는데 왜 건강이 악화되었을까?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수렵채집인의 생활 양식이 오히려 인간의 신체 진화에 걸맞음에도 불구하고 농업이 시작되면서 "구석기 방식의 식생활"을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농업 도입 이후 결과적으로 인간의 진화와 식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남아 있는 문제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207


 농업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핵가족이 특징적 주거 단위로 대두되었다. 이들은 서로가 별개의 집에 살면서 창고를 각자의 집에 두었다. 이는 곧 농업의 이점을 누리는 동시에 위험성을 감수할 주체가 집단 차원에서 핵가족 차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플래너리에 의하면, 초기 농업 공동체에서 공유가 갈수록 제한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농업은 토지 생산성을 높여주었지만, 동시에 평균 생산량의 차등이 발생했다. 둘째, 공유를 제한함으로써 균형 잡힌 상호 교환을 확인하기가 더 쉬워졌고 "속임수"를 방지할 수 있었다. 셋째, 공유의 축소, 토지 보유의 제한, 가정 단위의 사적인 저장으로 경제적 판단이 더욱 유연해졌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238


 이와 함께 <농업과 세계사 1>에서는 동물의 가축화가 언급된다.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1937 ~ )가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에서 밝혔듯, 구세계와 신세계의 결정적 차이를 가져온 가축화의 문제 역시 이 시기에 발생한 것을 보면 오늘날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의 기원이 BCE 12,000 ~ CE 500의 시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이 인류에 미친 영향력과 함께 문제 해결의 어려움을 함께 깨닫게 된다.  뒤이은 <농업과 세계사 2>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의 이행하는 여러 형태의 모습이 소개된다...


 서아시아와 동아시아 농업의 기원에는 곡물 재배뿐만 아니라 동물의 가축화도 포함된다. 이와 달리 메소아메리카의 농업이 시작될 때는 주요 곡물(옥수수)이 있었지만 개 말고 달리 길들인 동물은 없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240


 농업의 기원과 식물 재배 및 동물 사육 문제를 한꺼번에 놓고 보면 놀라운 측면이 드러난다. 즉 동물 사육(목축)보다는 대체로 식물(곡물)재배가 먼저였다는 사실이다.초기 농업의 대표적 중심지 세곡(중동 : 밀, 보리 ; 극동 : 쌀, 기장 ; 메소아메리카 : 옥수수, 콩, 호박)을 보더라도 모두 동물 사육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식물 재배가 이루어졌다... 유라시아 전역에서 채택한 생활 경제의 핵심은 복합 영농이었다. 적어도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라면 거의 예외가 없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300


 목축(pastoralism)이란 초식 동물 무리에 의존하여 생활하는 것으로 자연히 유목민의 삶을 포함한다고 했다. 유목민의 삶이란 특히 토지 소유 및 거주 환경과 관련하여 목축미의 사회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적 문제다. 이 주제는 특히 토지 사용과 관련하여 이동식 목축민과 정주적 농민 사이에 분쟁의 소지가 있을 때 더욱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319

mtDNA 연구에서 주장하는 결론은 정복자 모델이다. 신석기 시대에 근동 지역에서 유럽 지역으로 상당한 규모의 이주가 있었고, 그들이 차례차례 등 짚고 넘기(leapfrogging) 식으로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원주민 포레이저 집단에 동화되어 오늘날 같은 유전자 분포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는 고고학의 연구 결과와도 일치하는 주장이다. - P88

개별 언어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곧 그들이 공통의 조상, 즉 과거 어느 시점에 사용되었던 하나의 조어(祖語, protplanguage)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후손이라는 의미이다. 후손 언어는 분열된 세포와 같다. 단세포 생물이 세포 분열을 하듯이, 조어는 여러 개의 파생 언어(daughter language)로 갈라진다(p126)... 언어의 계통수가 인간의 역사를 추적하는 밑바탕을 제공할 수 있는 이유는, 무릇 언어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사회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회에 흡수된다면 그들의 언어도 곧 소멸하고 만다. 반대로 어떤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내분으로 갈라지더라도, 혹은 일부 집단이 갈라져 나와서 멀리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더라도 각각의 집단은 기존 언어를 계속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어휘나 문법은 지역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며, 언어 분화의 과정이 비로소 시작된다. - P127

기존 연구에 따르면, 정주민의 경우 출산율이 높게 유지되었다. 여기에 농업까지 도입되면 출산율은 더욱 높아지는데, 농업 이행기 초기부터 출산율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출산율이 증가한 이유 중 하나는 수렵채집인과 달리 아이를 데리고 이동해야 하는 부담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량 공급량이 늘어나면서 이유식이 준비되어 있었고, 보다 안전한 식량 공급이 가능하기도 했다. 또한 농업을 받으들인 사람들의 사망 당시 연령 평균이 수렵채집인보다 더 낮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농업 공동체의 식생활이 이전의 수렵채집인보다 더 나빠졌기 때문에 농업인에게서 성장 문제가 나타나는 것은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다. - P227

목축의 입장에서 사료나 목초지는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다. 이 문제는 목축을 하는 사람들과 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장 주목할 만한 특성은 그들의 영역 및 이동성이다. 대부분의 목축 사회가 사막, 반건조 초원 지대, 고원 지대, 툰드라, 고위도 삼림 지대 등에 분포하고 있다. 이들 지역의 대부분은 대규모 곡물 농사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들이다. 곡물 농업 혹은 복합 영농이 가능한 지역이라면 생계 전략으로 목축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 P303

지속 가능한 생산의 차원에서 본질적인 문제는 문화적 관습과 목표가 근본적으로 농업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른 시공간에서는 전혀 다른 농업이 실행된다(p365)... 도시 환경에서 노동의 조직화는, 기존의 상식에 따르면 위계질서에 입각한 통치 계급의 직접 관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고도로 중앙 집권화된 정치, 경제 조직은, 고고학이나 역사학적으로 시대에 따라 가끔 그러한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고대 정치 체제에서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도시의 특징은 경제 시스템의 여러 측면을 좌우하는 것일 뿐, 정치적 측면이 고도로 집중화되었는지 여부는 별로 상관이 없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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