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이야기하면 지금 우리 사회, 1997년과 2008년의 경제 대란을 겪은 이후의 한국은 신자유주의에 그 어느 나라보다 난폭하게 포획된 상태가 되었잖아요. 그러한 삶의 공간 속에서 안전한 계층이 없어진 거죠. 중상류층조차 삶의 불안감 때문에 종교의 위로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거기에 웰빙교회가 자리를 잡지 않았나 합니다.

회사에 머물며 노동하는 시간도 길지만, 정보 시스템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퇴근하고 나서 하는 외국어 공부, 컴퓨터 프로그램 공부를 비롯해 접대 마케팅, 인맥 만들기를 위한 각종 사적 활동까지 포함하면 실제 노동시간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길죠. 노동의 연장으로서 술을 마시며 몸이 축나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죠. 그런 것이 피로사회에 나타나는 ‘번아웃’(burnout)형 질병, 즉 소진성 질병의 배경이 되어서 당뇨라든가 혈관계·순환계 질환, 정신적 질환이 만연하게 됩니다. 그런 질병이 건강 염려증을 낳고, 건강 염려증을 시장화하는 한국의 헬스케어 시스템 속에서 더 많은 병이 발굴되고요. 꼭 치료하지 않아도 되는 병까지 치료하게 되는 시스템이 건강을 위기에 빠지게 하는 거죠. 그런 사회에 한국이 진입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배타성은 오히려 더 강화된 측면이 있어요. 저는 그들끼리 나누는 문화에 이미 함축되어 있는 배타성을 우려합니다. 그 배타성은 전형적인 ‘부드러운 야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외부에서도 노골적인 배타성으로 보이지 않고 집단 구성원들도 스스로 배타적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상 배타성이 작동하는 문화가 있죠. 그 구성원들은 모임에 소속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편견을 은연중 갖게 돼요. ‘부드러운 야만’이란 누군가를 우리의 기억에서 삭제해가는 일을 가리킵니다. 생각을 하면 호혜를 베풀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을 연습하죠. 그렇게 기억에서 삭제된 이들에 대한 몰이해가 발생하고, 이는 배타적인 태도로 이어집니다

한국의 종교시장에서 개신교가 엄청난 힘을 가진 이유 중 하나는 교육 인프라를 상당 부분 독점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초·중·고등학교 가운데에서도 미션스쿨 계열이 많고, 대학은 70퍼센트 이상이 사립대학인데 그중 가장 많은 것이 기독교계입니다. 그런 곳에 교직원으로 채용되려면 세례증명서, 담임목사 추천서까지 필요합니다. 기독교에 대해 가르칠 사람이 아닌 일반 과목을 가르칠 사람이나 일반 직원을 뽑을 때도요. 학생들에게는 채플 수업을 강요하고요. 신학교가 아닌 이상 이런 것은 일반 교육 부문인데 일반인에게 특정 종교의 소속을 요구하는 것은 위헌입니다.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요소죠.

가끔씩 강제송환을 앞둔 아프가니스탄 피난민들이 교회에서 농성을 하며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 안으로는 경찰이 들어오지 못하니까요. 목사들이 그들을 도와주고 국가 앞에서 그들의 입장을 변호하며 보호해주는데,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올바른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이야기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 사회의 희생물이 되어야 할 외부자에게 무조건 자비를 베푸는 것 말이에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일체의 사회 안전망이 없는 세상에서 교회가 그걸 제공할 수 있었던 거예요.

한국인들은 사실 종교에 기대고 싶은 마음을 상당히 갖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19세기 들어 조선왕조가 노쇠하고 자생력을 잃어가자,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 속에서 불안감이 심해졌고 거기에 대한 대응으로 새로운 종교가 많이 태어났죠. 한편으로는 서학(西學)이 들어왔고요. 천주교가 탄압받았다고 하지만 그 과정을 보면 종교로서 탄압받았다기보다는 외국과의 연결이나 간첩 문제로서 탄압받았던 게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1801년 황사영(黃嗣永) 백서의 경우 프랑스 군대를 불러들이려 했던 것이니, 요즘 식으로 말하면 중대한 외환죄(外患罪)에 해당하는 일 아닙니까. 중국의 가톨릭 주교에게 ‘여기를 좀 쳐주시오’라고 보낸 편지였으니까, 지배층 입장에서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겠죠.

미움이라는 마음작용이 적대적 테러 행위로 이어지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필요한데, 남한의 경찰기구나 미군정 정보기관이 그 장치를 마련해준 거죠. 이렇게 해서 테러 행위에 참여하게 되면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 일은 훨씬 수월해지고요. 그런 점에서 이는 ‘수행적 적대’라고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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