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주는 근년에 군사를 출동하였으나 공로를 세우지 못하자 마침내 군사 활동을 쉬고 백성들을 쉬게 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수십 년 동안 군사를 사용하지 않으시면 소강(小康, 조그만 안정)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당주가 말하였다. "장차 죽을 때가지 사용하지 아니할 것인데 어찌 수십 년이라 하시오?"

"영전(營田) 가운데 비옥한 것이 있으면 이를 팔아 수십만 민(緡)을 얻어서 국가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황제가 말하였다. "이익이 백성들에게 있는 것은 마치 국가에 있는 것과 같은데, 짐이 이 돈을 어디다 쓸 것인가?"

애초에, 당 명종(明宗) 시절에는 재상인 풍도와 이우(李愚)가 판국자감(判國子監) 전민(田敏)으로 하여금 《구경(九經)》을 교정(校正)하여 판각(板刻)으로 새겨서 인쇄하여 이를 팔게 하라고 주청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좇았다. 정사일(9일)에 판각이 완성되어 이를 헌납하였다. 이로부터 비록 난세(亂世)라 하더라도 《구경》이 전해지고 퍼진 것이 아주 넓게 되었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임오일(7일)에 제장들을 침전(寢殿)으로 불러서 그들을 나무라며 말하였다.
"짐은 즉위한 이래로 나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고, 오로지 군사들을 넉넉하게 하려고 생각하였고, 부고(府庫)에 축적된 것과 사방에서 공헌해 온 것은 군사들에게 먹이는 것 이외에는 남은 것이 거의 없는데, 너희들은 어찌 이를 알지 못하는가! 지금 마침내 흉악한 무리들을 멋대로 내버려 두어서 입을 놀리며 인주가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을 돌아보고 국가가 가난하고 모자라는 것을 살피지 아니하며, 또 자기가 무슨 공로를 세워서 무슨 상을 받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 오직 원망하는 것만 아니 너희들은 편안한가?"

황제는 누차 진왕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옛날에 내가 서쪽으로 정벌하면서 당(唐)의 18능(陵)
을 보았는데, 발굴되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다른 것이 없고 오직 금과 옥을 많이 넣어 두었던 연고이다. 내가 죽거든 마땅히 종이로 만든 옷을 입히고, 와관(瓦棺)으로 거두는데, 신속하게 장사를 지내고 궁중에 오래 머물러 있게 하지 말라. 광중(壙中)은 돌을 사용하지 말고 옹기(甕器)로 이를 대신하는데, 공인(工人)이나 역도(役徒)는 모두 고용하고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장사를 끝내면 능 근처에 있는 백성 30호만을 모집하여 그들의 잡된 요역을 면제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이를 돌보게 하며, 하궁(下宮, 지하 무덤의 궁전)을 만들지 말라. 능을 지키는 궁인(宮人)을 두지 말고, 돌로 된 양·호랑이·사람·말을 만들지 말라. 오직 돌에다 새겨서 능의 앞에다 두는데, ‘주(周) 천자는 평생 검약(儉約)하기를 좋아하였고, 명령을 남겨서 종이옷과 와관(瓦棺)을 사용하라고 하여 사천자(嗣天子, 천자를 이어받은 사람)는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라고 하라. 네가 혹 나의 말을 어기면 나는 너에게 복을 주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말하였다. "옛날에 당 태종은 천하를 평정하면서 일찍이 스스로 가지 않은 적이 없는데, 짐이 어찌 구차스러운 편안함을 행하겠소?"
풍도가 말하였다. "폐하께서 능히 당 태종처럼 될 수 있는지 아직은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나의 병력이 강함을 가지고 유숭을 깨뜨리는 것은 마치 산으로 달걀을 누르는 것과 같을 뿐이오."
풍도가 말하였다. "폐하께서 산과 같이 될 수 있는지는 아직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황제는 기뻐하지 않았다. 오직 왕부(王溥)만이 가기를 권고하였다. 황제는 이를 좇았다.

경신일(17일)에 태사·중서령인 영문의왕(瀛文懿王)
풍도(馮道)가 죽었다. 풍도는 어려서 효도로써 이름이 알려졌고, 당(唐) 장종(莊宗)시대에 비로소 귀하고 드러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여러 왕조에 걸쳐서 장수·재상·삼공·삼사(三師)의 지위를 떠나지 않았는데, 사람됨은 깨끗하고 검소하며 관대하고 넓어서 사람들은 그가 기쁜 것인지 화내는 것인지를 헤아리지 못하였고, 말을 잘하고 지혜가 많아서 뜨고 지는 것을 받아들였고, 일찍이 《장락노서(長樂老敍)》를 저술하여 스스로 여러 왕조를 걸치며 영광을 맞이하였던 상황을 서술하였으니, 당시의 사람들은 왕왕 덕행과 도량이 있는 사람으로 그를 추대하였다.

구양수(歐陽修)가 논평하였습니다. ‘예의염치(禮義廉恥)는 나라의 네 가지 강령이다. 네 가지 강령이 넓혀지지 않으면 나라는 마침내 망한다.’
고 하였다. 예의는 사람을 다스리는 큰 법도이고, 염치는 사람을 세우는 큰 절도인데, 하물며 대신(大臣)이 되어서 염치가 없다면 천하에 그 혼란이 없을 것이며, 국가에 그 망하는 일이 없겠는가! 풍도의 《장낙노서》를 읽어보니 그는 스스로 서술하면서 영광으로 생각한 것을 보고서 그가 염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알 수 있었으니 그런즉 천하 국가가 좇아갔던 것을 알겠다.

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하늘과 땅에는 지위가 만들어져 있는데 성인은 이것을 모범으로 삼고 예(禮)를 만들어 법도를 세우니, 안으로는 부부(夫婦)가 있고, 밖으로는 군신(君臣)이 있습니다. 지어미는 지아비를 좇다가 죽을 때까지 고치지 않는 것이며, 신하가 임금을 섬기다가 죽는 일이 있어도 두 마음을 품지 않는데, 이것이 사람으로서의 큰 도리입니다.

풍도가 재상이 되어 다섯 왕조와 여덟 성을 거쳤는데, 만약에 여관에서 지나는 손님을 보는 것과 같이 하여 아침에는 원수의 적(敵)이었지만 저녁에는 군신(君臣)관계가 되어 얼굴을 바꾸고 말씨를 변조하면서 일찍이 부끄러움이 없는데 큰 절개가 이와 같다면 비록 조금의 훌륭한 일을 하였다 하여도 어찌 칭찬할 만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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