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는 한(漢)의 궁중에 있던 보기(寶器) 수십 개를 모두 내어 뜰에서 부수고 말하였다. "무릇 제왕이 되어서 어디에 이런 물건을 쓰겠는가? 듣건대 한의 은제는 매일 비첩(婢妾)이나 총애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금중(禁中)에서 오락하고 놀았으며 진기한 장난감을 옆에서 떼어놓지 않았다는데, 이 일은 먼 옛날의 일이 아니니 의당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어서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계하여 지금부터 진기하고 화려하며 눈을 기쁘게 하는 물건을 궁궐로 들여오지 못하게 하였다.

늘이 한(漢)의 운명을 망하게 하기에 이르러 군사들은 양(梁, 도읍인 개봉)의 교외에서 흩어지고, 항복한 장군과 패배한 군사들이 뒤를 이어서 도착하니 경은 즉시 말머리를 돌려서 지름길로 구음(龜陰)으로 돌아갔던 것인데, 주군을 위하여서나 시절을 위하여서도 처음도 있고 끝도 있는 것이오. 이른바 위험한 혼란 속에서 충신의 절개를 보이는 것이며, 빠른 바람이 부는 데서 단단한 풀 같은 마음을 알게 되니, 만약에 신하된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이와 같을 수가 있다면 국가를 소유한 사람 가운데 누가 채용하지 않겠소?

왕준은 사람을 통하여 황제에게 말하였다. "진주성(晉州城)은 견고하여 쉽게 뽑혀지지 않을 것이고, 유숭(劉崇, 북한주)의 군사는 바야흐로 날카로워서 힘써 다툴 수는 없습니다. 군사를 머물게 하는 까닭은 그 기세가 쇠퇴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고 신이 겁을 먹은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새로이 즉위하셨으니, 의당 가볍게 움직이셔서는 아니 됩니다. 만약에 거가(車駕)가 사수(?水, 사수관, 하남성 형양현의 서북쪽 사수진)를 건너게 된다면 모용언초(慕容彦超, 태녕절도사, 치소는 연주)가 군사를 이끌고 변주(?州, 하남성 개봉시)로 들어가게 되어 큰일 납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스스로 손으로 귀를 잡아당기며 말하였다. "거의 나의 대업을 그르칠 뻔하였다!"

북한의 토지는 척박하고, 백성들은 가난한데 안으로는 군대와 나라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밖으로는 거란을 받들게 되니 세부는 번거롭고 부역은 무거워서 백성들이 즐겨 살지 아니하고 도망하여 주(周)의 경계로 들어오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당은 열조(烈祖, 1대 徐知誥, 즉 李?) 이래로 항상 사자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서 거란과 서로 관계를 맺으며 이와 더불어 같이 중국을 통제하려고 하여, 다시 서로 선물을 보내며 맹약하여 형제로 하였다. 그러나 거란에서는 그 물건을 이로움으로 생각하고 다만 헛소리를 하면서 왕래하였을 뿐이고 실제로는 당을 위하여 쓰이지 않았다.

북한주(北漢主)가 이존괴와 장원휘에게 말하였다.
"짐은 고조(高祖, 오대 후한의 유지원)의 대업이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져서 오늘 지위와 칭호는 부득이하여 이것을 칭(稱)하게 된 것이며, 나를 돌아보건대 무슨 천자이며, 너희들이 무슨 절도사(節度使)이겠는가?" 이로부터 종묘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보통 사람의 집에서 하는 것처럼 하였으며, 재상의 월봉(月俸)도 100민(緡)에 그쳤고, 절도사는 30민에 그쳤으며, 그 나머지에게는 야박하게 제공하였을 뿐이었으니, 그러므로 그 나라 안에서는 청렴한 관리는 적게 되었다.

왕준에게 명령하여 사방에서 공헌(貢獻)하는 진기하고 아름다운 먹을 물건들을 멀리하라고 하고, 경진일(18일)에 조서를 내려서 이것들을 모두 없애게 하였다. 그 조서의 대략이다.
"받드는 것은 짐의 몸에 그치지만 손해를 보는 것은 농부와 서민을 덮고 있다." 또 말하였다.
"유사(有司)들 속에 쌓여 있는 것은 아주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다." 또 조서를 내려서 말하였다.
"짐은 군려(軍旅) 가운데서 자라 학문을 가까이하지 않아서 천하를 다스리는 도(道)를 아직은 알지 못하니 문무관원 가운데 나라에 이익이 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술법을 가진 사람은 각기 봉사(封事)27를 갖추어서 보고하고, 모두 의당 그 일을 직서(直書)하고 말씨를 관계하지 말라." 황제가 소봉길의 집을 왕준에게 하사하니, 왕준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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