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홍조의 사람됨은 침착하고 강하며 말수가 적었지만 무리를 어거하는 데는 엄하고 가지런하였고, 장교(將校)가 조금이라도 명령을 좇지 않으면 바로 때려 죽였으며, 사졸들이 지나가는 곳에서 민전(民田)을 범하거나 말을 나무에 매어 놓는 사람은 모두 목을 베었고, 군대 안에서는 숨을 죽였고 감히 명령을 범하지 못하였으니, 그런고로 가는 곳에서는 반드시 승리하였다.

애초에, 거란주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발해(勃海, 수도는 용천부)에서 죽자, 술률태후가 추장과 제장을 죽였는데 무릇 수백 명이었다. 거란주 야율덕광이 다시 국경 밖에서 죽자 추장과 제장들은 곧 죽을 것이 두려워서 마침내 거란주 야율올욕을 받들어서 군사를 챙겨서 북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거란주는 중화의 풍속을 사모하여 진(晉)의 신하를 많이 채용하였지만 술과 여색 속에서 거칠어졌고 여러 추장들을 가볍게 보고 거만하게 대하니 이로부터 그 나라 사람들이 붙지 않고 여러 부(部)들은 자주 배반하자 군사를 일으켜서 죽이고 토벌하였는데, 그러므로 몇 년 동안은 남쪽으로 침구할 겨를이 없었다.

고종회가 뒤를 잇게 되자 당(唐)·진(晉)·거란·한(漢)이 다시 중원을 점거하였고, 남한(南漢)·민(?)·오(吳)·촉(蜀)은 모두 칭제(稱帝)하였는데, 고종회는 그들이 사여(賜與)하는 것을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향하여 칭신(稱臣)하였다. 여러 나라들이 이를 천(賤)하게 생각하여 ‘고무뢰(高無賴)’
라고 불렀다.

무술일(17일)에 황제는 업도의 성 아래에 도착하여 고행주의 영채(營寨)에 묵었다. 고행주가 황제에게 말하였다.
"성 안에는 식량이 아직은 다하지 않았으니 급히 공격한다면 다만 사졸들만을 죽이고 아직은 쉽게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늦추어서 저들의 식량이 다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황제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한의 고조는 유주(幽州)의 죄 없는 백성 1천500명을 죽였으니 어진 것이 아니었는데, 장련을 유인하여 이를 죽였으니 신의가 아니고, 두중위의 죄는 큰데 그를 사면하였으니 형벌이 아닙니다. 어짊으로써 무리들에게 합쳐지고, 믿음으로써 명령이 시행되며 형벌로써 간사한 사람을 징치(懲治)하는 것인데, 이 세 가지를 잃고서 어찌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그 복을 주는 운이 길어지지 않는 것은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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