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에서는 유주(幽州, 燕京, 북경시)를 남경(南京)으로 삼았다.

상유한이 황제에게 권고하기를, ‘정성을 다하여 원한을 버리고서 번진을 어루만져주고, 말씀을 낮추고 예의를 두텁게 하여서 거란을 받들며, 사졸을 훈련시키고 병장기를 수선하고서 무예를 닦아 대비하고, 농업과 양잠에 힘써서 창고를 채우며, 상고(商賈)를 유통하게 하여서 재화(財貨)를 풍요롭게 해야 합니다. 몇 년 사이에 중원은 점차 안정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애초에, 거란주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강성하니, 실위(室韋, 내몽고 동북부)·해(奚, 낙하 상류)·습(?, 요하 이북)이 모두 역속(役屬)되었다. 해왕(奚王) 거제(去諸)는 거란의 탐욕과 포학함에 괴로워하다가 그의 무리를 인솔하고 서쪽으로 가서 규주(?州, 하북현 회래현)로 옮겨서 유인공(劉仁恭) 부자에게 의탁하고 서해(西奚)라 불렀다. 거제가 죽자 아들인 소랄(掃刺)이 섰다.

"듣건대 유사에서 관직에 제수하면서 모두 뇌물을 받는다는데 그런 일이 있소?" 대답하였다.
"떠도는 말이라서 믿을 만하지 않습니다."
민주가 말하였다. "짐이 이를 안 지가 오래되었고, 지금 경에게 위임하니, 현명한 사람을 뽑아서 제수하되 불초하고 기망하는 사람이라도 관직을 요구하는 사람은 거절하지 말고 차례로 뇌물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장부에 적어서 그것을 바치시오."

2월 경진일(3일)에 좌산기상시 장윤(張允)이 <박사론(?赦論)>을 올렸다.
"제왕(帝王)이 천재(天災)를 만나면 대부분 사면하는데 이를 수덕(修德)이라 합니다. 가령 두 사람이 감옥에 앉아 있다가 사면을 만난 사람이 있다면 굽은 사람은 면제받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것이나 곧은 사람은 원통함을 품을 것이고 억울한 기운이 승문(升聞, 제왕에게 보고를 올리는 것)하게 되니 이는 재난에 이르게 하는 것이지 재난을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서를 내려서 그를 칭찬하였다.

병술일(11일)에 좌간의대부인 설융(薛融)이 간하였다.
"지금 궁실이 비록 불에 타서 훼손되는 일을 겪었지만 오히려 제요(帝堯)의 띳집보다도 사치스럽습니다. 사용한 비용은 비록 적었으나 오히려 한 문제(文帝)의 노대(露臺)보다는 많았습니다. 하물며 위성(魏城, 하북성 대명현)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으며 공사 간에 어렵고 군색(窘塞)하니 진실로 폐하께서 궁관(宮館)을 수축하는 날이 아니고 해내가 평정되고 안녕하기를 기다려서 그것을 조영해도 아직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상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이어서 조서를 내려 그를 칭찬하였다.

황제가 거란을 섬기는 것이 심히 근엄하였고 표문을 받들어 신하라고 호칭하였으며, 거란주를 일컬어 ‘부황제(父皇帝)’라고 하였으며, 매번 거란의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황제는 별전(別殿)에서 배례하고 조칙(詔?)을 받았다. 해마다 황금과 비단 30만을 보내는 것 이외에도 길흉(吉凶)의 경사(慶事)와 조문하고 세시(歲時)에 선물을 보냈는데 진기한 노리개나 희귀한 것도 길가에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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