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가 노발대발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서희는 양현의 졸업을 고대했으며 진주에 돌아올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윤국이와 결혼시키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서희 꿈의 완성인지 모를 일이다. 이상현과 봉순의 딸 이양현과 최서희와 김길상의 아들 윤국이의 결합은. _ 박경리, <토지 18> , p367/672


<토지 독서챌린지> 36주차. 이번 주 독서챌린지 주제는 : '5부 3권에서 내가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은?'이다. <토지 18>의 인물 중 베스트를 선정하는 것이 주제인데,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토지>의 작품세계 특성상 되도록 폭넓은 인재 등용이 중요하겠지만, 이번에 읽은 18권에서는 모처럼 '최서희'가 존재감을 과시하기에 주인공 서희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서희의 어느 부분이 인상적이었을까? 페이퍼에서는 이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토지 18>에서 서희는 봉순(기화)의 딸 양현과 자신의 아들 윤국을 부부로 맺으려 한다. 오랜 기간을 한 가족처럼 지낸 양현과 윤국은 물론 남편 길상마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혼인(婚姻). 그렇지만, 서희는 주위 사람들의 감정과 혼란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이를 밀어붙인다. 역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서희의 모습에서 서희의 아버지 최치수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남매 사이로 그냥 두시오. 순리를 어기면 부작용이 생기는 법이오. 양현이는 당신 딸이 아니었소?"(p394)... "최서희는 이상현과 이루지 못한 연분을 윤국이 양현이 그 아이들을 통하여 이루려고 하는 거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소! 진정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말이오!" "여보!" "나는 빈껍데기를 데리고 산 게요. 구천에 사무치는 한이오. 내 인생이 아니었소." 하는데 갑자기 흰 바지저고리를 입은 길상의 모습이 남루한 몰골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얼굴도 어느덧 구천으로 변해 있었다.(p395)... "나는 최가가 아니오! 나는 김가요! 내 자식들은 최가가 아니오!" 안개같이 사라지면서 음성만이 울려왔다. _ 박경리, <토지 18> , p396/672


 <토지 1>에서 딸 서희가 가까이 하기 어려운 인물로 그려지는 아버지 최치수. 어머니를 잃은 어린 딸의 감정을 받아주지 않고,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딸과 거리를 둔 치수의 모습은 어린 서희에게 권위였고, 거스를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권위는 세월이 지나 자녀가 성장하면서 낮아지면서 거리를 좁혀가게 되지만, 치수는 이런 거리를 채 좁히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갈기갈기 갈라진 여러 개의 쇠가 서로 부딪칠 때 나는 것 같은 목소리는 여전히 음산했다. 그는 서희의 공포심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풀어주려는 노력이 없는 싸늘하고 비정한 눈이 서희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서희는 아버지의 눈을 피하기만 하면 당장에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질 것처럼 애처롭게 그를 마주 본 채 고개를 저었다. 치수는 웃었다. 그 웃음은 도리어 서희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_ 박경리, <토지 1>, p60/638


 서희로부터 시선을 돌린 치수는 서안 위에 펼쳐놓은 책의 갈피를 넘긴다. 허약한 체질에 비하면 뼈마디는 굵은 편이었다. 그러나 가엾을 만큼 여위고 창백한 그의 손이 책갈피를 누르면서 눈은 글자를 더듬어 내려간다. 손뿐인가, 뜰 아래 물기 잃은 목련의 앙상한 가지처럼, 그러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비참한 느낌이기보다 도리어 상대에게 견딜 수 없는, 숨이 막히게, 견딜 수 없어 결국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강한 분위기를 그는 내어뿜고 있었다. 어떤 일에도 감동되지 않을 눈빛, 철저하게 스스로를 소외시키면서 인간과의 교류를 거부하는 눈빛, 눈빛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뼈만 남은 몸 전체가 거부로써 남을 학대하는 분위기의 응결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 p61/638


 <토지 18>에서 이제는 집안의 어른이 된 서희. 그렇지만, 서희는 어린 시절 자신이 공포를 느꼈던 아버지와 화해를 이루지 못했고, 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 이후로 외롭게 살아야 했으며 조준구에 의해 간도지방으로 쫓겨나듯 떠나야 했다.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 분리불안의 감정을 느꼈을 서희. 그러나, 어린 서희는 이러한 불안감을 생전 아버지 앞에서 드러낼 수도 없었고, 혼자가 된 후에는 더욱 나타낼 수 없지 않았을까. 서희의 불안은 이렇게 억압되고 무의식 아래에 봉인된 채 서희는 자랐을 것이다.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지혜를 가진 어른으로.


 불안은 억압에서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기억 이미지와 일치하도록 정서적인 상태로 복제된 것이다... 정서 상태는 애초에 겪은 외상성 경험의 잔존물로서 마음에 새겨져 있다가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면 기억 상징들처럼 되살아난다. _ 지크문트 프로이트, <불안과 억압> , p153/277

 

  요즘 서희는 엄마 데려오라 하면서 패악을 부리지는 않았다. 차츰 엄마의 일은 뭔지 모르나 불가한 것이며 입 밖에 내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은 마음이 솟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꼬투리 잡아 울부짖었고 누구든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해주었으면 싶을 때 그는 겉돌려 가며 방금 길상에게 한 것처럼 더듬어보지만 아무도 그에게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희의 마음이 자란 것이다. 슬픔은, 다른 아이들에게보다 그에게 더 많은 지혜를 주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 p329/638


 처음에는 아버지에 의해, 나중에는 스스로에 의해 봉인된 서희의 불안함이 양현과 윤국을 맺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훗날 연결된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있다는 외로움으로 타향살이를 했던 서희에게는 '가족'이 무엇보다도 소중했을 것이다.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이 지켜야 할 가족. 이런 감정에 더해진 봉선에 대한 부채의식 - 자신을 돌봐준 것에 대한 고마움, 길상을 빼앗을 것에 대한 미안함, 기화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죄책감 등 - 이 '혼인강행'이라는 무리한 행동으로 끌고 간 것은 아니었을까. 서희 자신에게는 이런 자신의 행동이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황금률(黃金律 Golden Rule)이었겠지만, 주의의 사람들에게 강박증의 표현으로 비춰줬던 것은 아닐런지. 


 불안은 위험 상황에 대한 반응이며, 자아가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 또는 그 상황으로부터 물러나기 위해 어떤 일을 함으로써 미연에 방지된다. 불안이 생겨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증상이 형성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정곡을 찌르지 못한다. 그보다는 불안이 생겨남으로써 나타나는 위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증상이 형성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강박 신경증의 경우 나중에 생겨난 모든 증상 형성의 주요 원인은 분명히 초자아에 대한 자아의 두려움이고, 자아가 반드시 벗어나야만 하는 위험 상황은 초자아의 적개심이다. 여기에는 투사의 흔적은 없으며 위험은 완전히 내향화된다. _ 지그문트 프로이트, <불안과 억압> , p183/277


 자아가 그 일을 하는 데 성공을 거두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억압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쟁의 진행 방식이 양적인 관계에 의존할 수는 있다. 몇몇 사례들에서 우리는 그 결과가 강요된 것이라는, 즉 억압된 이드가 발휘하는 억압적 견인력과 억압력이 너무 커서 새로운 충동은 반복 강박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사례들에서는 힘의 또 다른 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결과를 알아냈다. 즉 억압된 이드가 발휘하는 견인력은 현실적인 삶의 어려움으로부터 오는반발로 강화되고, 그 어려움으로 인해 새로운 본능 충동이 취할 수 있는 다른 모든 길이 막혀 버린다. _ 지그문트 프로이트, <불안과 억압> , p203/277


 이는 서희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계속 물음표를 던지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쉽게 답을 못하는 서희도 불행하지만, 윤국과 양현 역시 이로부터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면서 또 다른 불행이 싹튼다. 어제까지 자신의 피붙이로 느끼고 지내왔는데, 혼인을 통해 남매에서 부부로 바뀌는 관계 속에서 이들은 일종의 '근친상간'의 공포감을 느낀 것이다.


 '내 마음속에 정말 그이가 말했듯이 이루지 못한 연분에 대한 한이 남아 있었더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아. 결코 그렇지는 않아. 나는 양현을 전생의 인연으로 생각했다. 그 아이의 행복을 원하는 마음에는 추호도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이제 와서 날더러 어떻게, 내가 뭘 어떻게 잘못했는가.'(p400)... '욕망이란 했었지, 욕망, 그렇다면 그 욕망이란 바로 이상현 그 사람을 집착한다 그런 뜻이었던가.' _ 박경리, <토지 18> , p401/672


 어쩌면 양현을 누이 아닌 한 여자로 의식했을 때.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그 순간부터 윤국은 내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란 괴로운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도 양현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수없이 생각하곤 했었다. 어머니한테서 양현과의 혼인 얘기를 들었을 때 전신에서 피가 끓는 것을 느꼈고 또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환희인 동시 일종의 공포 같은 것이기도 했다. 양현은 늘 그의 마음속에서 피안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정체 모를 불안이 있었다. 양현이 사랑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불안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에 대해서는 상상의 문에다가 자물쇠를 걸어놓고 굳게 밀폐해버렸던 것이다. 스스로 망상이라 생각했으며 터무니없는 일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늘 꿈틀거렸고 숨통을 막는 것만 같았다. _ 박경리, <토지 18> , p437/672


 줄리엣 미첼 (Juliet Mitchell, 1940~)은 <동기간 : 성과 폭력 Siblings : Sex and Violence>에서 동기(同氣, 형제자매)간 문제를 분석한다. 구체적으로 친밀한 형제자매 사이에 얽혀있는 관계에서 일부는 '근친상간'이라는 금지된 행동을 막기위한 터부로 죽음, 상실과 같은 이미지도 있지만, 이면에 있는 사랑, 생명을 통해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첼의 분석이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서희의 행동은 '생명으로부터 죽음'으로 향하는 역진(逆進)적인 것이다.


 근친상간은 경계의 횡단이며, 또는 그것의 동기적 기반을 생각해볼 때 경계의 부재다. 그것이 비행을 가리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타자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필요, 감정, 자리에 대한 그 어떤 인정도 없다. 아무런 책임도 없으며, 오로지 삼투적인 유혹의 빨아들임만 있다. _ 줄리엣 미첼, <동기간> , p116


 동기적 성과 죽음은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자기로서의-타자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사랑은 또 다른 자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일단 깨닫게 되면 살의 속에서 폭발한다. 하지만 일단 살인에 저항하면, 새로운 형태로 사랑이 돌아온다. 유일무이한 자기는 애도될 수 있으며, 바로 여기서 모든 충동들이 자신들의 표상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상실이 느껴지게 된다. 나르시시즘적 자기 사랑은 다만 거울 이미지만을 갖는다. 웅대하고 유일무이한 자기의 상실에 의존하는 새로운 자기존중은 표상을 -자기자신의 주체임(subjecthood)의 상징적 판본을 - 갖는다. 금지된 것은 네가 사랑해야 하는자를 죽이는 것이다 - 너 자신의 삶은 그 터부를 존중하는 것에 의해 보장된다 : 너 자신을 네 이웃을 사랑하듯 사랑하라. 젠더들이 상이한 역할을 하더라도, 동기간 성은 성적 차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_ 줄리엣 미첼, <동기간> , p68


 이러한 책 내용에 비춰볼 때, <토지 18>에서 서희의 행동은 자신의 아들과 딸들을 오히려 죽음과도 같은 공포로 밀어 넣는 것으로 생각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에 따르면 윤국은 양현과 함께 지내면서 이성의 감정을 느꼈고, 이로부터 막 벗어났을 것이다. 그런 윤국을 '혼인'이라는 사건을 통해 극복한 옛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은 극심한 혼란과 공포를 그에게 주지 않았을까. 작품에는 직접적으로 서술되지 않았지만, 양현 또한 마찬가지 감정을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토지 18>에서 서희 자신은 결코 원치 않았겠지만, 어린 서희가 아버지 치수에게 느꼈던 공포감과 상실감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안겨주고 말았다. 아버지를 두려워했지만, 결국 아버지와 같은 서희. 이런 서희의 모습은 자아(Ego)로 태어나 결국은 초자아(Super Ego)의 일부가 되는 우리의 모습처럼 인상깊게 다가온다. 또한, 이런 서희의 모습 속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 부모를 미워하면서도 성장하면서 부모를 닮은 자식의 모습을 생각하면서이번 독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통상 남성은 사랑의 대상을 최종적으로 선택하기까지는 자기 어머니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때로는 자기 누이까지도 그렇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장벽 때문에 남성의 애정은 어린 시절부터 애정을 기울였던 두 대상으로부터 그 두 대상과 유사한 외부의 대상에게로 옮겨간다. _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의 기원> , p37/379                                           


 나의 슬픔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나의 슬픔은 그러니까 외로움 때문이 아니다. 그 어떤 구체적인 일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일들이라면 나는 어느 정도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가 있다. 생각보다 나의 근심 걱정이 그렇게 심한 건 아니라는 믿음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일종의 가벼움 혹은 자기관리가 그런 일들 속에서는 가능하다. 나의 슬픔이 놓여 있는 곳, 그곳은 다른 곳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라는 사랑의 관계가 찢어지고 끊어진 바로 그 지점이다. 가장 추상적인 장소의 가장 뜨거운 지점... _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 p88/530


 PS. 줄리엣 미첼은 영국의 사학자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 1938 ~ )의 전 부인이다.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 이후 페리 앤더슨의 책들을 리뷰할 계획이었는데, 언급된 김에 미리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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