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평 3년(192년) 여름 4월. 청주의 황건적 100만명이 연주로 침입하여 임성국의 재상 정수 鄭遂를 죽이고 방향을 바꾸어 동평 東平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유대가 그들을 공격하려 하자, 포신이 간언했다.
"지금 적의 군사는 100만이고, 백성들은 두려워 벌벌 떨고 있으며, 병사들은 싸우려는 의욕이 없으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 적의 군사력을 관찰하면 늙은이와 젊은이가 뒤섞여 있고, 무기와 식량 등이 구비되지 않아 완전히 약탈에만 의지하여 조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군사의 힘을 축적하여 지키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그들은 싸워도 이길 수 없고 공격 또한 하지 못할 것이니, 형세는 반드시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정예 군사를 선발하여 요충지를 점거하면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유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황건적과 싸워 결국 죽임을 당했다... 황건적을 추격하여 제북 濟北까지 쫓아가니 황건적은 항복을 요청했다.
겨울. 조조가 항복한 30여만 명과 남녀 100여만을 받아들였으며, 그 중에서 정예들만을 거두어 '청주병 靑州兵'이라 불렀다. _ 진수, <삼국지> <위서> <무제기> , p54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 三國志> <위서 魏書>에서는 무제 조조(曹魏 太祖 武皇帝 曹操, 155~220)과 청주병(靑州兵)의 만남을 위와 같이 서술한다. 청주병을 만나기 전 이름은 높았으나, 여러 군웅(軍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조조는 이후 원술(袁術, 155년 ~ 199), 도겸(陶謙, 132~194) 마침내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원소(袁紹, ?~ 202)까지 격파하며 천하의 3분의 2를 얻을 수 있었다.
조조가 청주병을 얻은 것이 그의 이후 행보에 큰 전환점이 되었듯, 이번 대선에서 이재명이 2030여성(개혁의 딸)들의 지지를 얻은 것도 향후 그의 정치 여정에 변곡점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