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사람들이 구상해야 할 것은 우리의 구체적 역사체험에 걸맞은 새로운 연방적 구조이며, 그같은 구상이 없이는 ‘국가연합이라는 에움길’마저도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 새로운 연방 구상에 반영될 체험은, 한편으로 적어도 10세기에 걸친 정치적 통일성과 아울러 예외적으로 높은 인종적·언어적 동질성을 지금껏 지니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 분단의 오랜 지속과 엄혹함 탓에 이미 상이한 국민형성의 몇몇 단초적 양상을 보이고 있기도 한 주민집단의 경험을 당연히 포함한다. 동시에 그 구상은 국가연합적 ‘에움길’의 체험 그 자체도 반영해야 할 텐데, 국가연합의 성립은 영구분단론자들에게는 십중팔구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가하는 한편, 현재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인구이동의 적절한 통제 및 점진적이고 상호협상에 의한 군비축소를 위해 ‘민족에 대한 공화주의적 또는 민주적 관점’에서는 일반적으로 감안되지 않는 합법적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남북의 기득권세력들이 분단의 유지에 어느정도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분단체제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분단이데올로기는 남한의 극우반공논리로 한정될 수 없다. 북한식 통일지상주의 역시 그것이 북쪽의 분단정권 유지에 필요할뿐더러 객관적으로 남쪽의 반공세력을 강화하는 작용마저 한다는 점에서 북한판 분단이데올로기라 하겠으며, 이렇게 극좌와 극우를 오가며 변신할 수 있는 것이 분단이데올로기라면 상황에 따라 또다른 변종도 낳을 수 있다고 보아야 옳다.

굶주리는 동포를 우선 돕고 보자는 공감대는 이제 남한에서도 뒤늦게나마 확산되고 있다. 이때 제시되는 가장 흔한 논리는, 기근 또는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는 인류애와 동포애가 먼저고 이런저런 정치적 고려를 개입시킬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타당한 논리인 동시에, 극우세력 일부가 최소한의 인도적인 조치에 대해서조차 ‘군량미로의 전용’ 운운하면서 아직도 제동을 걸려고 하는 작태를 볼 때 이 ‘비정치적’ 논리가 그나름의 정치적인 효험을 지니기도 한다.

따라서 변혁의 전망은 분단체제를 넘어 당연히 그 상위체제인 세계체제까지도 대상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이 경우에도 일정한 역사적 여건이 무르익기 전에는 부분적인 개선 이상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요, 따라서 특정 지역에서의 혁명조차도 세계체제의 맥락에서는 개량에 불과하거나 심지어 개악일 수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분단체제의 변혁 또한 세계시장의 논리 자체를 철폐하는 세계사 차원의 변혁에는 미달하리라는 것이 냉엄한 현실인데, 그러나 이 부분적인 개선작업이 성공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어쨌든 인류사회의 개선이지 개악이 안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세계체제의 실상에 근거한 변혁의 비전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다수 민중의 수준높은 정신수양이 갖춰지기 전에 강압적으로 물질적 평등부터 구현하고 보자는 ‘현실사회주의식’ 방법은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현실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는 바로 평등사상의 그러한 ‘진실한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 결과라는 해석이 오늘날 적지 않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