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세 가지 의미의 ‘체제’를 동일선상에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일견 복잡성을 더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혼란을 제거하는 데 이바지한다. 곧, 세계체제와 그 속의 분단체제 그리고 후자를 구성하는 두 분단국가의 ‘체제’는 각기 다른 차원에 속하면서 구체적인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이다.
남북한이 각기 완결된 체제가 못 되는 이유가 이처럼 단순히 세계체제의 하위범주라서만이 아니고, 분단이 되지 않은 국가들과는 달리 남북한이라는 두 개의 하위체제의 경우에는 그들이 세계체제에 참여하고 세계체제의 규정력이 그 내부에 작동하는 방식이 일정하게 구조화된 분단현실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분단체제’라는 또 하나의 체제 개념이 끼여들 수밖에 없다.
남북한에 걸친 분단체제와 이에 맞선 남북한 민중을 대립의 기본축으로 잡을 경우, 남북한 당국의 합의는 어디까지나 남북한 민중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증대하게끔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결말이고, 이 과정에서 쌍방 정권들의 입장이 얼마나 대등하게 반영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분단체제극복 구상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물론 한반도에서 새로운 전쟁이 터지는 사태다. 전쟁재발은 설혹 그 결과가 6·25보다 더욱 심한 한반도의 초토화와 민족의 대살상까지는 안 갈 수 있다 하더라도 민중의 창의력이 발휘되는 통일에는 결정적인 타격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전쟁의 가능성은 단순히 기득권세력의 선동이나 협박으로 돌릴 일이 아니고 민주화운동·통일운동의 입장에서도 진지하게 검토할 문제이다.
일국사회 역시 사회분석의 기본단위일 수는 없고 ‘세계체제’의 하위체제(subsystem)에 해당한다는 것이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등의 세계체제분석에서 일관되게 강조되는 시각인데, 그렇다고 이것이 일국사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상이 아님은 물론이다. 근대 세계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하나의 토대를 지닌 사회이면서 많은 수의 일국사회들이 모인 열국체제를 상부구조로 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경제적 실체로서의 계급은 엄밀히 말해 세계체제 전체 차원에서 규정되지만, 그 자기형성과정이나 정치투쟁의 전개는 일국사회 차원의 고려를 떠나서는 무의미해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계급담론은 어떤 경우에도 단순해질 수 없는데, 단지 그 점이 한반도처럼 분단체제라는 특이한 중간항이 끼여들었을 때에 더욱 도드라질 따름인 것이다.
그는 17세기의 네덜란드, 19세기의 영국, 2차대전 이래의 미국 등 세 개의 패권국가가 그때그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가운데 자본주의 세계체제가─자본주의적 근대라는 큰 틀 안에서지만─세 개의 상이한 ‘근대’를 경험해왔다고 주장한다. 그중 첫 단계의 특징을 중상주의, 둘째 단계를 산업주의라고 한다면 미국이 주도하는 제3단계는 ‘대량소비’의 세계요,
중요한 것은 물론 통일 한반도의 모습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점이다. 우리가 당장에 선택할 방어적 전략의 내용도 여기에 좌우될 것이다. 그런데 분단체제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한 하위체제요 세계체제의 수명은 이 하위체제보다 길 것이라는 전망이 정확하다면, 분단체제가 극복된다 해서 우리가 곧바로 시장경제의 논리에서 벗어날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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