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은 법을 잘 지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할 뿐, 현실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처음부터 법률문제는 '포기가 곧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법률문제에 시달려본 구술자 중에는 판검사들이 변호사를 통해 돈을 받는다고 믿고 변호사에게 거액을 건넨 사람도 있습니다.(p233)... 시민들이 이런 고통을 겪는 동안 법조인들이라고 해서 그들만의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실비, 휴가비, 전별금 등이 관행이었던 시절에도 판검사들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법시험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신성가족의 일원이 된다 해도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했습니다. (p234)... 의사소통이 단절된 틈바구니에서 자라난 브로커라는 직업도 애환이 많았습니다. 법대 졸업생으로 청운의 꿈을 품고 또는 가정형편 땜누에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건만, 기본급으로는 생활이 너무 어렵고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235/276


 내일이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난 5년 동안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고, 그중에서도 사법개혁은 언론개혁과 함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지만, 문제점만 깊이 인식했을 뿐 아직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해결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는 사법부 문제, 이 문제를 이번 페이퍼에서는 여러 권의 책을 통해 대략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은 법으로부터 소외된 시민들, 핵심 엘리트 집단에 소속하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법조인들, 언제 잡힐지 모르면서도 살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브로커 집단들을 묘사하며, 법의 이해관계자들 모두가 불행한 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의 기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우리나라 법조계의 제도적, 물적/인적 토대는 모두 일제시대에 마련되었다. 이 간단한 사실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프랑스와 독일의 법제를 받아들인 일본은 이를 그대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했다.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었던 전통적인 법과 제도는 대한민국의 형성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일본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제도와 개념이 식민지에 제대로 정착할 리 없었다. 개념과 현실의 틈새에서 고문, 조작, 과장, 각종 뒷거래가 독서벗처럼 자라나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만큼 모든 기반이 허약했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75/526 


 김두식의 다른 책 <법률가들>은 사법부 문제의 기원을 찾아가는 책이다. 일제 하 이른바 근대제도의 정착과정에서 전통과의 단절과 갑작스러운 제도의 이식은 혼란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혼란이 가라앉기 전 더 빨리 찾아온 해방은 사법부를 비롯한 극심한 혼란을 가져왔다. 일본이 남기고 황급히 떠나고 남긴 자산이 남한 내 부의 불평등 시초였다면, 사법부에서 이법회 문제는 학문과 권력에서의 불평등 시초였다. 1945년 해방으로 중단된 조선변호사시험 응시생 전원에게 합격증을 배부한 '이법회'문제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공정성 문제의 기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에 이들 수험생들이 시험에 응시해 합법적으로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기간동안 자격없는 이들에게 주어진 기득권의 문제는 법조계에 대한 일반의 '불공정'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적산(敵産)은 점령지대 안에 소재하는 적국 소유 또는 적국국민 소유의 재산을 말한다. 승전국인 미국 입장에서는 조선에 있는 일본재산은 모두 미국 것이었다. 승전국에 귀속된다는 의미에서 '귀속재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조선인 입장에서 보면 '적산'은 일제가 식민통치 기간 동안 수탈한 우리 재산이었다. 여기에서 수많은 혼선이 빚어졌다... 한동안 적산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적산 처리는 남한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갈리는 첫 분기점이었다. 정치적 힘이 곧장 경제적 힘으로 연결된 계기이기도 했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163/526


 일제시대 시험에 붙은 사람들을 법원에서 내쫒는다고 해서 일제유산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법조계만큼 해방전후 구분이 의미없는 분야도 없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의 경성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미 몇차례 운을 띄운 이법회 문제다. 이법회는 유태흥 대법원장이 말하는 '열패고(劣敗苦)'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36/526


 이법(以法)은 문자 그대로 '법대로' 하자는 의미였고, 자신들의 문제를 법으로 풀겠다는 의지를 보인 작명이었다. 이법회 회원들의 요구사항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이렇다. "이법회원들은 변호사시험 중단의 책임은 일본국 정부나 조선총독부나 시험위원회에 있다는 것이고, 만일 끝까지 시행하였더라면 응시자 전원이 합격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하여, 조선 불성취의 책임을 수험생 측에 전가시킨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고집하며, 응시자 전원에게 변호사시험 합격증서를 교부하라고 요구하였다 한다."(p438)... 이들의 실체가 중요한 이유는 그 숫자 때문이다. 1945년도에 합격증을 받았다고 알려진 106명은 22년 동안 시행된 이전의 전체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 총수에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38/526


 이와 함께, 해방 직후 한국전쟁은 또 다른 불행을 가져온다. 1961년 위청룡 검찰국장의 죽음에서 드러나듯, 조금이라도 북한과의 연계성을 의심받을 경우 좌익으로 몰려 인사상의 불이익은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법률가들. 한국전쟁 이후 이들 앞에 펼쳐진 세상은 반공(反共)을 국시로 한 군사정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군사정부에 협조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으로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위청룡의 죽음에 대해 완벽한 진실을 알 수는 없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위청룡의 인생은 크게 보면 두가지 이유로 망가졌다. 첫째는 삼팔선 이북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고, 둘째는 해방후에 너무 늦게 남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는 평남 평원에서 태어나 평양 지방법원에서 서기로 일했고 거기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조만식 선생을 흠모해 북한 검사가 되었고 오래되지 않아 밀려났다. 남쪽 사람들은 겪지 않았을 일이었다... 위청룡은 북한의 무모한 대남공작과 그에 맞서는 남한의 무리한 수사 사이에 끼어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억울한 법률가였다. 별이 저절로 굴러 손에 들어오던 시대였으나 동시에 누구도 안정하지 못한 시대였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28/526


 그렇지만,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군사정권의 압력에서도 과거의 사법부는 자신들의 사찰에도 너그러운 그들의 후배들과는 달리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사법파동을 위해 양심을 가진 판사들이 사직서를 던져가며 저항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법부는 인혁당 사건(1964), 동백림 사건(1967) 등을 거치며 서서히 몰락해 갔음을 우리는 한홍구의 <사법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법파동은 사법부 스스로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력에 맞섰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도였지만, 사법파동의 허망한 결말은 오히려 사법부로 하여금 저항의지를 잃게 만들었다. 이범렬에 이어 홍성우, 김공식 등이 법원을 떠나고, 1973년의 법관 재임용 심사로 평소 권력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던 법관들이 다 잘려 나가면서 법원은 힘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유신 이후에는 중앙정보부원들이 대놓고 판사실을 들락거리게 된 것이다. _ 한홍구, <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 p69/384 


 한홍구는 같은 책에서 박정희의 유신 정권 아래에서도 끊임없이 저항해온 사법부가 몰락한 결정적 계기를 '대법원장 비서관 뇌물 사건'으로 바라본다. 여러 검사와 판사, 변호사가 파면과 사임, 제명을 당한 이 사건을 통해 판사와 검사는 독립된 사법부가 아니라 안기부의 통제를 받는 기관으로 전락하는 굴욕의 역사가 1980년대 사법부의 역사였다. 


 1983년 1월 1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업자에게서 뇌물을 받고 부하에게서 상납을 받은 '전' 철도청장 안창화의 구속을 발표했다. 이때 검찰은 유태흥 대법원장의 '전' 비서관 강건용(이사관)이 "구속 중인 형사피고인을 보석으로 풀려나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피고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뇌물 액수가 크다는 데 있지 않았다. 강건용이 구속될 때만 아무도 이 사건이 일파만파 번져가 검사 두 명의 파면, 서울지검장과 서울지검 남부지청장의 인책 사임, 부장판사 두 명의 사임. 변호사 세 명의 제명 등 사법사상 전무후무한 파문을 낳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을 통해 안기부는 검찰과 법원에 대한 확실한 힘의 우위를 과시했다. _ 한홍구, <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 p147/384


 <법률가들>, <사법부>에 서술된 사법부의 지난 역사는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법조인들과 사법파동 이후 남은 판사들의 권력지향적 모습, 1987년 민주화 이후 국정원으로 축소된 권한을 대신한 검찰권력의 대두로 요약된다. 그 사이 진정으로 시민과 법 앞에 공정성을 위한 저항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움직임은 '잔 속의 태풍(A Storm In The Teacup)'에 불과했던 것이 민과 법조인들 사이의 채울 수 없는 틈을 만들지 않았을까. 자신의 눈을 '무지의 베일'이 아닌 선글라스로 가린 법조인들의 모습은 정의로운 판관(判官)이 아닌 기름부음을 받은 왕(王)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 또한 당연할 것이다. 법에 기댄 권위자에 의한 통치.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시민들의 삶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면 '아주 많이' 좋아진 것은 재벌과 검찰이었다. 과거에는 독재자가 정보기관이나 권력기관을 서로 견제시켰고 재벌의 힘도 상당히 통제했다. 그러나 철저하지 못한 민주화는 민주공화국 대신 삼성공화국과 검찰공화국을 불러왔다. 재벌의 불법행위를 단속해야 할 검찰은 재벌에 의해 관리되는 '떡찰'이 된 지 오래다. 통제받지 않는 두 권력, 삼성과 검찰의 결탁은 진정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이제 검찰개혁은 한국 민주주의의 존망을 가름할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_ 한홍구, <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 p354/384


 플라톤(Platon, BC428 ? ~ BC348)은 초기에 <국가 정체 Politeia>를 통해 철인(哲人)에 의한 정치를 주장했지만, 후기에는 <법률 NOmoi>에서 법률에 의한 지배로 그의 통치철학으로 사상의 변화를 말한다. 이러한 변화가 사람에 의한 이데아의 실현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법률(法律)이라는 시스템의 구축으로의 변화라고 한다면, 오늘날 스스로 권력화한 사법부의 모습은 법률에 근거한 법률가의 정체에 다름 아니다.


 5권 473d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이 : ho philosophos)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basileus) 또는 '최고 권력자'(dynastes)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지혜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 권력'(dynamis politike)과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 : philosophia)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kakon paula)은 없다네. _ 플라톤, <국가 정체> , p365


4권 712a 일체의 권력(dynamis)에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원칙)이 마찬가지로 타당합니다. 곧, 최대의 권력이 한 사람에게 있어서 지혜로움(phronein) 및 절제 있음(마음이 건전함)과 한데 합쳐질 때, 그때에 최선의 정체(나라 체제 : politeia he ariste)와 그런 법률의 탄생이 실현을 보지, 그 밖의 방법으로는 결코 그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p315)...  722e 정말로 nomoi(법률)인 것들, 바로 이것들을 우리는 국법이라 말하는데, 이것들의 전문(前文 : prooimion)은 일찎이 아무도 말한 적이 없으며, 설사 그걸 지은 사람이 있었더라도, 그게 햇빛을 보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참주적 지시로 언급되었던 것, 즉 자유롭지 못한 자들로 우리가 말한 의사들의 지시들에 비유되었던 것, 이것은 절대적인 법(nomos akratos)으로 여겨지고요. _ 플라톤, <법률>, p246


 스스로 신성가족화하고, 이러한 신성가족에 저항했을 때 어떤 대가가 따르는 지는 우리는 지난 사건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과거와는 달리 올림푸스로 가는 길이 '사법고시'라는 외길이 아닌 '로스쿨 law school'이라는 여러 길이 났음에도 이 여정에 오를 수 있는 이들은 최소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선택된 이들이라는 현실속에서 우리는 보다 진지하게 이러한 사법부의 문제에 대해 장단기적인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법부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다음 문제 중 하나임이 분명하지만, 이 문제를 풀게 될 지 아니면 시험지까지 도로 빼앗기게 될 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우리의 못다한 숙제를 마저 하기 위해서라도 내일 3월 9일 선거와 선택은 우리에게 중요할 것이다...


 저는 법원이나 검찰에서 가족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바로 이 신성가족을 떠올립니다. 법원 신성가족의 일원이 되러면 사법시험이라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판사직 진입이라는 더 좊은 관문도 통과해야 합니다... 돈과 압력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가족 내부의 청탁은 변호사들의 청탁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됩니다. 변호사들의 청탁은 어떤 순수의 탈을 써도 결국은 돈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117/276


 이 거대한 가족구조 안에서 혼자 깨끗한 척해봐야 검찰 분위기가 바뀔 리가 없고, 싸가지 없다고 찍힌 검사 꼴만 될 뿐입니다. 그 검사가 싸가지 없는 이유는 이 거대한 신성가족을 무시하고, 그저 '현재 검사인 사람만 검사'라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가치를 무너뜨린 사람에게는 호적에서 파내는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게 마련입니다. 신성가족은 프리미엄도 누리지만, 그에 따른 의무도 준수해야 합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130/276


이 모든 문제는 변호사와 의뢰인, 변호사와 판검사들 사이의 소통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변호사와의 안면이 왜 중요합니까? 판검사들이 일반적으로 법정에서 오가는 공식적인 이야기에는 신경을 덜 쓰고, 뒤로 안면 있는 변호사가 전해주는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237/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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