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법조계의 제도적·물적·인적 토대는 모두 일제시대에 마련되었다. 이 간단한 사실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프랑스와 독일의 법제를 받아들인 일본은 이를 그대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했다.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었던 전통적인 법과 제도는 대한민국의 형성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판결문, 공소장, 소장, 피의자신문조서, 심지어 호적등본 양식 하나도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 없다. 자유(freedom), 권리(right), 사회(society), 개인(individual) 같은 핵심개념도 모두 일본인의 손을 거친 번역어였다. 일본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제도와 개념이 식민지에 제대로 정착할 리 없었다. 개념과 현실의 틈새에서 고문, 조작, 과장, 각종 뒷거래가 독버섯처럼 자라나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만큼 모든 기반이 허약했다.

이 책의 등장인물 대부분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법조계에서는 누가 친일파인지 따져봐야 큰 의미가 없다. 고등관 이상을 기준으로 삼으면 판검사는 모두 친일파에 해당한다. 조선변호사시험 출신 순수 변호사라고 해도 일제시대 말기의 친일강연에 동원된 경우가 많았다.

일제시대부터 해방을 거쳐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격변기에도 시험합격을 통해 법률가가 되려는 개인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목표로 하는 시험의 이름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법회원들의 수험인생이 이를 잘 보여준다. 수험생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해방전후의 시대 구분과 아무 상관없이 자신이 고시에 합격한 그날이었다. 고시합격의 기쁨은 해방의 감격보다도 컸다. 바늘구멍의 시험제도는 우수한 인력을 길들이는 유용한 방편이었다. 판검사나 변호사 업무가 갖는 공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출세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출세의 개인성’은 고시와 연결된 한국 법조계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해방공간을 주도한 보수적인 법률가들은 호남과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서쪽지역 출신이 많았다. 중도와 좌익 법률가들은 영남, 강원, 함경도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동쪽지역 출신이 많았다. 적어도 큰 흐름은 그랬다. 재미있는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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