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군대가 깊이 들어가니 사람들은 모두 죽기에 이를 것이니 싸우게 되면 스스로 배(倍)의 힘을 내었다. 무릇 멀리 보는 사람은 가까운 것을 돌아보지 않고, 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상세하게 보지 않는 것이니, 만약에 조금 이긴 것을 자랑하고 조금 실패한 것을 걱정하게 되면 먼저 스스로를 묶는 것이니, 어느 겨를에 공을 세우겠는가?" 무리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이소는 자기를 받드는 일에서는 검소하였고, 병사들을 대우하는 데서는 풍성하게 하였고, 현명한 사람을 알아서 의심하지 않았고,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단안(斷案)을 내릴 수 있었으니, 이것이 그가 성공한 이유였다.

애초에, 발해왕(渤海王) 대언의(大言義)가 죽자 동생 간왕(簡王) 대명충(大明忠)이 섰고 기원(紀元)을 고쳐서 태시(太始)라고 하였는데, 1년 만에 죽자 숙부 대인수(大仁秀)가 서고 연호를 고쳐서 건흥(建興)이라고 하였다. 을사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상사(喪事)를 알렸다.

배도가 대답하였다. "바야흐로 종류별로 모이는 것인데, 사물은 무리로써 나누어지는 것이며 군자와 소인 가운데 뜻과 향하는 것이 같은 사람은 형세로 보아 반드시 서로 모이는 것입니다. 군자가 무리를 이루면 이를 동덕(同德)이라고 하고, 소인들이 무리를 이루면 붕당(朋黨)이라고 합니다. 밖으로는 비록 비슷한 것 같으나 안으로는 실제로 현격하게 다르니, 성스러운 주군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들이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을 구별할 뿐입니다."

전국(戰國)시대부터 노·장(老·莊)은 유자(儒者)와 다투어 비교하면서 서로 옳고 그르다고 하였다. 한의 말기에 이에 불교가 덧붙여졌는데,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은 오히려 적었다. 진·송(晉·宋) 이래로 날로 번창하여 제왕에서 사민에 이르기까지 높이고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아랫사람은 죄짓는 것과 복 받는다는 것을 사모하고, 높은 사람은 ‘공(空)’과 ‘유(有)’를 가지고 논란(論難)하였다.

다만 한유는 그것이 재물을 좀먹고 무리들을 현혹시키는 것을 싫어하여 힘써 이를 배척하였고, 그 말은 대부분 격렬하게 만들어졌고 너무 지나쳤다.

오직 ‘송문창사서(送文暢師序)’만이 그 요점을 가장 잘 드러냈다. "무릇 새란 머리 숙여 쪼아 먹고 우러러 사방을 돌아보며, 짐승은 깊은 곳에 살면서 가끔 나오는 것은 다른 물건이 자기에게 해가 될 것을 두려워 하지만 오히려 면치 못한다. 약한 것의 고기는 강한 것의 먹이이다. 지금 나는 문창(文暢)과 편안하게 살며 한가하게 먹으며 넉넉하게 놀면서 살고 죽는 것이지만 금수(禽獸)와 다른 것인데 정녕 그것이 나온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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