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가운데는 물건을 싸가지고 시장으로 갔다가 심지어는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으니, 이름은 궁시(宮市)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이것을 빼앗았다. 상고(商賈)들은 좋은 재화를 가지고 있으면 모두 이를 깊이 숨겼는데, 매번 칙사가 나가면 비록 장(漿)을 팔거나 떡을 파는 사람들일지라도 모두 일을 거두고 문을 닫았다.

신라왕(新羅王) 김경칙(金敬則)이 사망하여, 경인일(22일)에 그의 적손(嫡孫) 김준옹(金俊邕)을 책봉하여 신라왕으로 삼았다.

애초에, 발해(勃海)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가 사망하였는데, 아들 대굉림(大宏臨)이 일찍 사망하여 친척동생인 대원의(大元義)가 섰다. 대원의는 의심이 많고 사나워서 그 나라사람들이 그를 살해하고 대굉림의 아들인 대화서(大華嶼)를 세웠는데, 이 사람이 성왕(成王)이며 연호를 고쳐 중흥(中興)이라 하였다.

대화서가 사망하자, 다시 대흠무의 어린 아들인 대숭린(大嵩?)을 세웠는데, 이 사람이 강왕(康王)이고 기원을 고쳐 정력(正曆)이라 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