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군자(君子)는 다른 사람들보다 들뜨게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상곤(常袞)이 봉록을 사양한 것은 염치가 있는 것이니, 무릇 자리를 굳게 지키며 봉록을 탐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낫지 아니합니까!"

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신이 듣기에 사람을 쓰는 것은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 그리고 신진 인사와 옛날 사람 사이에 다름이 없어야 하고, 오로지 어진 사람이냐 불초한 사람이냐를 헤아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아직은 반드시 어질지 아니한 데도 친하고 오래 사귀었다 하여 그를 채택한다면 진실로 공평한 것이 아니고, 참으로 어진데도 가까이 있고 오래 사귀었다 하여 그를 버리는 것도 역시 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평로(平盧, 치소는 청주, 산동성 청주시)절도사 이정기(李正己)가 먼저 치(淄)·청(靑)·제(齊)·해(海)·등(登)·내(萊)·기(沂)·밀(密)·덕(德)·체(?)의 열 주(州)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이령요(李靈曜)가 난을 일으키자 여러 도(道)가 군사를 합쳐서 공격하여 얻은 땅은 각각 갖게 되어 이정기는 또 조(曹)·복(?)·서(徐)·연(?)·운(?)의 다섯 주(州)를 얻었고, 이어서 청주(靑州)에서 운주(?州)로 치소를 옮기면서, 그의 아들인 예전의 치주(淄州) 자사였던 이납(李納)으로 하여금 청주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정기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매우 엄하여 있는 곳에서는 감히 짝하여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법령이 가지런하게 하나로 되었고, 부세는 고르면서도 가벼웠으며, 병사 10만 명을 갖고 있으면서 크게 동방(東方)을 점거하였으므로 이웃의 번진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은 경계 안에서 보루를 쌓고 무기를 수선하느라고 허비하는 날이 없게 하였다. 이 때문에 비록 중국에서 명목상 번신(藩臣)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사실은 만맥(蠻貊)처럼 다른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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